이 땅의 가을 기미는 후각 신호로 먼저 다가온다. 뜨거운 여름 햇살 스러지자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의 고약한 냄새가 스멀스멀 온 도시를 점령한다. 오래 전부터 은행나무를 좋아한 도시인들에게 전해오는 가을의 기미다. 우리나라에는 은행나무 없는 마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이다. 느티나무 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임에 틀림없다.
은행나무는 학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학교의 상징인 교목으로 삼은 경우도 많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는 옛날 중국의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가르침을 베푼 이야기와 관련된 이유가 크지 싶다. 학교와 같은 건물이 없던 2천5백 년 전, 공자는 은행나무 그늘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의 거리 학교를 `행단'이라고 부른다. 은행나무를 뜻하는 행(杏)과 교단을 뜻하는 단(壇)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여기에 약간의 혼란이 있다. 행단의 '행'자가 살구나무를 뜻하는 한자와 같은 글자여서다. 은행나무에 맺히는 씨앗인 은행이 나무에 매달렸을 때의 모습이 살구보다 작기는 해도 영락없이 살구를 빼어닮은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은행나무의 씨앗에 '은빛 나는 살구'라는 뜻에서 '은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은행나무는 형광빛 노란 색으로 물드는 단풍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병충해와 공해에도 강해서 도시의 가로수로 더없이 좋은 나무다. 또 씨앗은 약재로도 쓰일 만큼 요긴하다. 은행나무를 좋아할 이유가 하고하지만, 은행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냄새만큼은 견디기 힘든 게 사실이다. 아무리 은행나무가 좋아도 씨앗의 고약한 냄새까지 반길 수는 없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은행나무의 씨앗을 맺는 나무는 따로 있다.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나뉘는데, 당연히 수나무에서는 씨앗을 맺지 않는다. 수나무만 골라 심는다면 가을에 부닥쳐야 하는 은행의 고약한 냄새는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처음 심을 때 수나무를 골라내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대개의 나무가 그렇지만, 은행나무도 어린 시절부터 씨앗을 맺지 않는다. 대략 30년쯤 된 나무에서야 비로소 씨앗이 맺힌다. 그때까지는 암수 구별이 어렵다. 최근에는 은행나무에 씨앗이 달리기 전에 암수를 구별하는 감별법을 여러 방식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아직은 정확한 암수 구별이 어려운 상황이다.
은행나무는 지구상에 가장 먼저 출현한 생명체 가운데 하나다. 공룡이 살았던 시절에도 은행나무는 있었다. 지금의 은행나무가 처음 지구에 출현한 것은 약 2억7천만 년 전인 중생대 초기였고, 신생대에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한 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은행나무 종류는 지구의 땅 위에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식물 종류라 할 수 있다. 그때가 4억 년 전이다. 고대침엽수 종류, 소철 종류와 함께 나타난 은행나무 종류는 여느 생물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번성했다. 그러나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의 은행나무 종류들은 모두 멸종하고, 지금의 은행나무만 살아남았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까지 부르는 이유다.
지금 우리 곁에 살아있는 은행나무는 생명 대멸종의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종족을 유지해온 놀라운 생명력을 가진 나무다. 심지어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일본의 히로시마에서도 살아남은 경이로운 나무다. 모든 생명이 사라진 피폭 지역에서도 은행나무 여섯 그루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2026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1천 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가 열두 그루나 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는 신라가 멸망하자 금강산으로 숨어들던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하는 1천1백 년을 살아온 은행나무가 있다. 조선 세종 때에 '당상관'이라는 벼슬을 받기까지 한 이 나무는 높이 42미터의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큰 나무다. 그밖에도 1천3백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도 있고, 줄기가 모두 썩어 문드러진 채 맹아지만으로 1천5백 년을 살아온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도 있다.
모두가 공룡이 바라보고, 공룡과 함께 살았던 나무의 후손이다. 공룡이 사라진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은행나무는 충분히 경이로운 나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