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묘문화, 이대로 괜찮은가?
최근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명품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그 중에 제주도의 ‘올레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은 숲과 산책을 주제로 함으로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지리산의 둘레길은 아직 건설 중인 것으로 현재 운봉-주천 코스가 완성되어 많은 여행객이 즐기고 있다. 고즈넉한 옛 마을을 둘러보며 한국전쟁 당시의 아픈 과거를 회상하는 가운데 숲과 갈대, 맑은 개울이 도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준다.
그런데 이곳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산책길 도처에 나타나는 산소다. 잘 돌보지 않아서 을씨년스러운 산소에서부터 지나치게 잘 가꾸어 호화스러운 산소까지 모두 문제다. 어떤 산소들은 후손을 잘 두어서인지 왕릉을 방불케 할만큼 호화스러우며 천박한 석물을 두르기까지 해서 일종의 경관 공해를 이루고 있다. 이와 비슷한 현상으로서 전국의 명산 바위에는 어김없이 누구 누구의 이름 석 자가 파져있다. 북쪽 금강산 관광길에서 봤던 바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부 독일의 아름다운 대학도시 튀빙겐에서 우리는 20세기의 석학 ‘에른스트 블로흐’의 묘
지를 볼 수 있다. 도시 공동묘지에서 다른 무덤과 차이가 없는 가운데 비석에 단지 ‘ERNST BLOCH 1885-1977’이라고 적혀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있는 ‘칼 맑스’의 무덤도 그가 가진 역사적 무게와 비교할 때 매우 소박하다. 단지 작은 흉상과 포이에르 바하 11번 명제 두 문장을 비석에 새긴 것이 있을 뿐이다.
가족에게 사적인 의미를 지닐 뿐인 사람들의 묘소와 이름을 치장하여 길이길이 남기려는 한국인의 심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농경시대 가족주의 문화의 유산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재는 농경시대도 아니고 가족주의적 가치관은 더 이상 지배적인 사회적 가치관도 아니다. 오히려 천박한 가족주의적 지평을 극복하는 것이 한국의 폐해인 많은 가족을 둘러싼 각종 사회적 현상을 극복하는 첩경이라고 본다면 장묘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의 선진화를 기하는 핵심사항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최근 화장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개인 묘소의 사용이 자제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중요 인사의 사망과 장례에는 의례 지관地官이 등장하고 풍수, 명당이 논의되며 대통령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 역시 이와 유사한 화제가 나타난다. 이는 결국 개인, 가족이기주의의 표현으로서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대안은 아름답고 접근성이 편한 서양식 도심 공원묘원을 설치하여 ‘월야의 공동묘지’ 같은 기존의 묘지 인식을 탈피하는 것이며, 보기 흉한 석물을 덕지덕지 설치한 가족묘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한국의 주택문화가 도시화, 산업화에 맞추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지배적인 형태가 된 것은 주거공간의 사회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장묘문화도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또 하나의 난개발이 아니라 환경친화적, 인간친화적인 격조있는 생활문화의 일부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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