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다. 그 이후,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검찰에 나가 긴 조사를 받았다. 이 일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윤리적으로는 잘못했으나 법적으로는 무죄이다’는 것이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는 이 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윤리는 자율의 원리이다. 자기 내면에 의해서 정해진다. 법적으로 무죄이더라도 양심의 가책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법에 의해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가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명령하였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스님이 된 일도 있다. 효봉 스님이다.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 것이다.
법률은 타율의 원리이다. 나의 바깥에 있는 규정에 의해 정해진다. 아무리 내가 문제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도 법은 전혀 다른 의견일 수 있다. 이는 모두의 권리를 보편적인 가치에서 보호하고 평등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외적인 강제성의 의해 집행되는 법은 종종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전 아내와 그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O. J. 심슨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진실은 그만이 알겠지만, 그가 만일 ‘법적으로만’ 무죄라면 그의 양심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J. J. 루소는 그의 <사회계약론>에서 사회구성원이 힘이 아닌 자발적인 의무의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힘에 의한 사회는 불평등하고 불안정하다.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 자발적인 관계는 윤리적이고 무제한적인 의무가 가능하다. 타율적이 아닌 자율적인 관계에서의 사회계약이다.
J. S. 밀의 ‘질적 공리주의’는 두 가지의 쾌락을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이 택하는 것이 행복이며, 외적이 아닌 내적인 가치에 따라 선택할 때 진정한 의미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럼 왜 윤리이고 자율이며, 스스로 결단하고 자발적으로 행해야 하는가?
윤리적이고 자율적인 태도에서는 일과 사태에서 순수하게 그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무한히 노력한다. 자기 결정이니, 나의 할 바를 다 할 뿐이다.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낸다. 나의 생이 마칠 때까지라도 말이다. 자신의 의무가 자랑스럽다.
타율적인 태도는 다르다. 일이나 사태의 내재적 가치보다는 외적인 가치, 예를 들어 경제적인 이익 등을 추구한다. 남에 의해서 하거나 일 자체가 아닌 다른 가치 때문에 한다. 이익이 주어지는 만큼만 한다. 남이 안 보면 일을 쉬거나 그만둘 수 있다. 이익이 달성되면 전체 일의 완성과 상관없이 멈출 수도 있다.
연구, 학업, 신앙, 예술, 취미, 사랑과 배려의 인간관계 등에서 우리는 자발적이고자 한다.
윤리적이고 자발적인 삶은 내면적인 의무와 가치를 스스로 찾아 행하고 추구할 뿐이다. 외적인 법적 평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윤리적인 사과는 온 생애와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러한 경지를 우리는 성인과 성자의 길이라고 한다.
양국현 방목기초교육대학 자연교양 교수
임선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