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야 할까?’
1988년 대학생이 된 뒤 고민에 빠졌다. 처음엔 전공(국어국문학)을 살려 선생님이나 시인이 되려 했다. 고교 시절부터 책 읽고 글 쓰기를 좋아해서였다.
그러던 중 캠퍼스 벽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정론직필의 기수에 도전해 보세요’. ‘명대신문사 28기 수습기자’ 모집 공고였다. 대학의 시대정신을 담는 기자(記者)는 매력적이었다.
주위에선 말렸다. “대학의 낭만은 포기해야 해” “권총(F학점) 만 여러 개 차야할 거야”라는 거다. 학보사 기자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잃는 게 더 많을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였다.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나를 한번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수습기자 시험에 응시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예상대로 학보사 생활은 고단했다. 원고지 한 장짜리 단신 기사를 수차례 퇴짜를 맞았다. 마감을 앞두고는 귀가를 포기해야 했다. 신문이 나오면 이를 직접 배달까지 도맡았다.
그럼에도 가슴 뿌듯했다. 내가 쓴 글이 인쇄돼 지면으로 나온다는 게…. 3년간 평기자, 만평기자, 부장, 편집국장을 맡아 악전고투한 날이 많았지만 즐겁게 버텼다. 매주 신문을 완성했을 때의 보람은 컸다. ‘대학의 낭만’은 기억에 별로 없지만 ‘인생의 목표’가 정해진 시간이었다.
1993년 대학 졸업 후 언론사 시험에 수차례 낙방했다. 그래도 꿈을 포기할 순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주간지 ‘TV저널’에 입사했고 연합뉴스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시대를 노래한 서태지, 청계천을 복원한 이명박 서울시장(전 대통령),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일군 이승엽을 만난 건 기자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다. 요즘은 역사전쟁으로 시끄러운 정치판을 지켜보는 중이다.
23년 째 기자생활. 예나 지금이나 쉽지는 않다.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수시로 선배에게 깨진다. 그럼에도 기자로 살 수 있음을 축복이라 생각한다. 특히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은 ‘명대신문’이었다. 명대신문의 환갑(還甲·61세 되는 생일)을 축하하며, 우리 학교 후배들에게 권하고 싶다. ‘새로움에 도전하라’고….
황태훈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국문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