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병이 만든 황홀한 설산
세상에 길 아닌 길이 있을까. 하지만 수많은 길 중에서도 특별한 길들이 있다. 실크로드, 차마고도 등등. 이런 길을 지날 때는 단지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간을 이동하는 것이다. 그 옛날 신라의 고승 혜초와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 서단의 도시 카슈가르에서 파미르고원으로 가는 이 길을 걸었다.
7,717m의 공어르산 북록을 휘돌아 옛 실크로드와의 합류지점인 부룬쿠르로 향했다. 가이즈 협곡을 빠져나와 3,000m의 고개를 넘자 고산병이 시작된다. <한서> ‘서역전’에서는 고산병에 대한 두흠(杜欽)의 말을 전한다. “사람이 대두통과 소두통의 산이나 적토, 신열의 언덕을 넘으면 독기 때문에 열이 나서 생기가 없어지고 두통과 구토를 일으키는데 이는 당나귀 등의 동물도 마찬가지다” 고산병을 겪으며 도착한 부룬쿠르 호수 앞에는 설산이 펼쳐져 있다. 이상하다. 지금은 눈이 쌓여있을 시기가 아닌데. 그 산에 점점 다가갈수록 비현실적으로 펼쳐진 풍경의 실체가 드러난다. 하얀 모래가 쌓여 있는 부룬쿠르 호수 앞의 백사산. 1920년대 까지만 해도 부룬쿠르 호수의 물은 넘쳐흘렀지만 지금은 반쯤 말라 모래로 덮여있다. 주변의 암석들이 풍화되어 호수를 메웠고 그 모래들이 다시 바람을 타고 산을 덮어버린 것이다. 아마 산의 모습도 과거와 지금은 달랐을 것이다.
차에서 내려 호수 주변을 걸었다. 여름에 접어들면 이곳은 푸른 초지로 변하고 많은 양들과 야크들이 풀을 뜯는다. 이곳의 주민은 키르기즈족이다. 한때 광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했던 부족이지만 이제 중국 땅에서는 인구수가 적은 소수민족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광막하고 황폐한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눈부신 붉은색의 스카프를 쓴 여성들과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코트를 걸친 남성들의 모습에서 아름답고도 강인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