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여름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백자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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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름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백자라고 불렀다
  • 최홍
  • 승인 2011.05.11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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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름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백자라고 불렀다

수많은 여름에 대해 우리는 그것을 백자라고 불렀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황인찬,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부분

요 며칠 어딜가나 <야광토끼>의 노래를 듣고 있다. ‘90년대 강수지와 하수빈의 계보를 잇는 한국적 걸 팝(김작가)’, ‘신스팝과 일렉트로니카의 활달한 만남’, ‘모던 락의 세련된 감수성에 실린 무겁지 않은 일상 터치’ 등등의 평가가 전혀 무색하지 않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그런 앨범이다. 정말로 ‘보랏빛 향기’ 시절의 강수지와 윤상의 성과물을, 2010년대식으로 재해석해놓은 것만 같다. 모나지 않은 20대 여성의 속마음과 감수성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부담없이 흥겹고, 발랄하고, 씁쓸하고, 편하고, 쿨하다. 아무리 좋은 앨범이라도 한 앨범에서 2~3곡을 건지기 힘든데 이 앨범은 전 곡이 다 마음에 든다. 이런 음악을 만나게 될 때마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고맙다. 또 한편, 도대체 어디서 이런 감수성을 얻었고,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어왔는지 부럽기 짝이 없고, 지금도 인디씬의 수많은 뮤지션들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이런 대단한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별로 없었던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솟구칠 정도이다. 가사 또한 참신하고 베리 큐트하다. 또 담백하다. 담백에 관해서 말하자면 ‘Long-D’라는 노래의 이런 가사. “뜸해진 너의 전화/나를 위한 거라고/멀어진 거리만큼 낯설어진 목소리/이젠 전화해서 울지 않고 우울해 하지도 않을 텐데/추억이 될 시간 추억이 될 시간 추억이 될 시간 추억이 될 시간”같은 가사 말이다. 이런 노래를 듣노라면 온통 ‘너 때문에 죽겠고, 아파 미치겠고, 총 맞은 것 같고, 심장이 없어진 것 같고, 허나 오늘밤 미치게 즐기겠다’는 대중가요의 센 가사들에 지친 내 마음이 담백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전화도 뜸해지고, 그것조차 나를 위한 거라고 변명하는 그 사람. 낯선 목소리. 이제 우리의 사랑이 추억이 될 시간이로구나. 이 담백한 수긍이 더 안타깝고 슬프다는 말이다.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황인찬의 작품도 그야말로 담백하다. 200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신인들의 목소리가 자주 ‘사춘기 소년 소녀’의 자장 안에서 ‘거칠고, 자유분방하고, 국외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황인찬의 보여주는 이상한 정적과 고요는 상당히 안정되고 클래식하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어떤 방 안에서 '백자'와 마주한 시적 자아. 질문을 던져보지만 백자는 대답이 없다. 당연하게도, 백자가 대답할리 있겠는가. 그런데 “지나간 수많은 여름”에 대해 “백자”라는 이름을 붙인 순간 어째서 환한 빛의 깨끗하고, 슬픈, 아름다운 이미지가 이 공간에 가득 들어차는 것일까. 모든 것은 여전한데도 어째서 “사라지면서/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믿을 수 없는 일은/여전히 백자로 남아있는 그/마음”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백자의 흰 빛과 함께 시적 자아 역시 빛의 둘레에 끌어당겨지면서 지워질 준비를 하는 것일까? 끝내 여름은 지나간다. 여름과 함께 빛나는 것처럼,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드디어 ‘내’가 사라졌을 때, 텅 빈 방안에는 백자의 순수한 아름다움만이 남고, 잔영처럼, 마침내 순결한 마음만이 남는다.     

필자: 박상수 시인ㆍ문학평론가ㆍ문예창작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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