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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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모르는 것들
  • 방연식
  • 승인 2010.10.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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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이름이다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전략) 언덕도 없었지만 분홍 설탕 코끼리는 오늘도 언덕에 누워 설탕을 먹고 분홍에 대해 생각했다. (……) 계절이 지나자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설탕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풍선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풍선 풍선 풍선이 되었다. 할 짓이 없구나. 네, 그럼요. 풍선 풍선 풍선은 이름이 바뀌었는데도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 서운했다.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 친한 사람들끼리 그러듯 막 대해줘도 좋을 텐데. 풍선 풍선 풍선은 일부러 잃어버린 장화 한 쪽을 손에 들고 이미 녹아버린 설탕을 음미하면서 하늘에 떠가는 분홍 설탕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구름 같았고 추억 같았고 눈물 같았다. 불지 않는 바람의 깃털 사이로 풍선 풍선 풍선의 없는 꼬리가 한 번 나부꼈다. 아니, 두 번 나부꼈다. 아니, 세 번 나부꼈다.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멋진 이름이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니, 「분홍 설탕 코끼리」 부분

 

두둥. 이제 세 사람 남았다. 존박, 장재인, 허각. <슈퍼스타K2> 얘기다. 세상에, 공중파 주요 프로그램 챙겨 보는 것도 벅찬데 이젠 케이블까지? 나도 그랬다. ‘야, 그건 리얼을 표방하면서 적자생존, 경쟁 만능을 성공 스토리로 포장ㆍ주입하는 미디어의 사골 프로 아냐? 루저들의 절박함이라는 억지 서사를 만들어서 싸구려 감동으로 증폭시키는 상업성에 정말 화가……’나기도 하지만 금요일 밤 11시만 되면 ‘본방사수!’를 외치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시청자 투표, 과연 몇 번을 누를 것인가. 이런지 꽤 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14일 목요일 현재, 일반인 134만 명 중에서 세 명이 남은 상태. 그 셋이 앞의 그 셋이다.

처음 존박은 많이 느끼했다. 한국말도 어색하고, 꼭 차인표가 처음 TV에 등장했던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기본적으로 아주 세련된 분위기가 있다. 중저음의 보이스, 엄친아의 자격을 갖췄고 회를 거듭할수록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다양한 매력이 장점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역시 장재인이나 허각에게 더 눈이 간다. 장재인은 초등학교 시절의 왕따, 고등학교 1학년 자퇴, 음악 독학이라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마음과 머리는 복잡한데 제 이야기를 할 방법이 없어서 음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허각(형 이름은 세상에, 허공이다)은 집 나간 어머니 대신 아버지, 쌍둥이 형과 살았다. 중학교 졸업의 학력에, 한 번도 음악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도 없고 환풍기 수리공으로 일하며 주로 이벤트 무대에서 노래를 해왔다. “내가 그 노래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부르다보니 노래할 때마다 빠져든다”고 말하는 이 사람. 어쩌나. 이상하게 이 둘에게 더 정이 간다(흑, 존박 미안). 상시적 불공정 경쟁에 시달린 나머지 그나마 이 정도라도 공정한 경쟁을 보여주는 프로가 없었기 때문일까? 개천은 더 개천이 되고 용은 꿈도 못 꾸는 세상에 살아서 이들의 성취에 감정이입이 되는 걸까?

장재인과 허각. 이들이 투명인간처럼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을 시절이 상상된다. 자퇴를 하고 천천히 걸어 나왔을 대낮의 하굣길이라든지, 환풍기를 수리하다가 고개가 아파 잠시 땅바닥에 주저앉아 땀을 닦았을 그 시절 이들의 모습. 누가 이 평범한 아이들에게 아는 척이라도 해 주었을까. 그건 아마도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제니의 “막 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랑받는 느낌도 없었다”는 시 구절처럼 그런 순간들이었을 것 같다. 막 대한다고 해도, 차라리 그런 사람이라도 내 곁에 있다면!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어떤 아이는 분홍 설탕 코끼리로 변신하기도 한다. 세상에 없는 언덕에 누워 구름을 쳐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분홍 풍선 풍선’으로 변했다가 기어이 ‘풍선 풍선 풍선’으로 변해가는 걸 느끼고야 만다. 외롭고 슬픈 풍선이다. 얘들아, 나 너무 외로워서 이렇게 풍선으로 변해버렸다. 나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슬픔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이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이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거대하며, 가장 쓸쓸하게 가벼운 이름.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장재인과 허각도 그런 풍선구름을 갖고 있을 것 같다.

필자: 박상수 시인ㆍ문학평론가ㆍ문예창작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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