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모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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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모르는 것들
  • 방연식
  • 승인 2010.10.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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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로키에

(전략)
움직이고 흘러가고 무너질 것들마다 아름다웠다
나는 그것에 목숨을 걸었지만
스스로 탄식하는 일은 아름답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일이 일어나도 수천 개의 해가 지고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수천 개의 별이 빛났다
해와 달과 별들이 한꺼번에 뜨는 날을 위하여
나는 무모하게도 거센 바람과 부딪쳤다
그제야 터널 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고
수천 개의 내가 공중을 날아다녔다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유쾌했다
사랑한다, 나의 영혼 로키에

-최성희, 「안녕, 로키에!」 부분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다시 읽은 것은 대학 4학년 겨울이었다. 그때 우리대학 학생들을 위한 열람실은 인문캠 본관 10층에 있었다. 필자는 열람실의 삐걱이는 마룻바닥과 높이 매달린 흐린 형광등. 그곳에서 바나나의 초기 소설을 다시 읽었다. 그전에 얼핏 바나나를 읽다가 일치감치 포기해버린 나였다. 주로 진지하고 무거운 한국 본격 소설들만을 읽어오던 필자에게 바나나의 작품은 한마디로 낯간지럽고 유치한 대중소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바나나의 소설을 다시 읽었던 것은 순전히 당시 막 시작한 연애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게 유일한 이유였다. 여자친구가 눈을 반짝이며 너무 좋다고 읽어보라고 건네준 책이 바나나의 책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필자는 절규하기는커녕 너무너무 행복하게 웃으며 감사의 멘트를 날렸다. “와! 이거 내가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그런데 이상했다. 입술을 깨물며 시작한 다시 읽기는 그 겨울을 훌쩍 넘겼고 다음해 여름까지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슬픈 예감>이 특히 좋았다. 95년도에 ‘시민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가 금세 절판된 책이었는데 역시 여자친구를 통해 구해 읽을 수 있었다(지금은 2007년 민음사판으로 읽을 수 있다). 낡은 집에서 혼자 사는 이모의 기이한 행적을 좇다가 결국 그녀가 자신의 친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도 매력적이었지만 필자가 놀란 것은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바나나의 감각이었다. ‘그날 밤의 나지막한 빗소리, 깊게 잠긴 어둠의 농도. 들어서자마자 닫힌 문 안쪽의 조용한 공간. (……)기쁨에 겨워 눈물이 나오려고 할만큼, 그런 자신감이 이상했다. 나는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이다’와 같은 문장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정말 눈물이 나도록 어떤 순간이 좋을 수가 있는 거구나. 그래도 괜찮은 거구나. 그 전에는 몰랐었다. 고통과 상처만이 문학의 전부라고 믿고 있었던 필자에게 바나나는 “너의 행복을 포기하지 마”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조금씩 변해갔다.
2006년, 시 전문 계간지 <시작>으로 등단한 최성희는 마치 바나나 소설의 어떤 부분을 시로 옮긴 것처럼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아름다운 시를 쓴다. 우리나라 시에 이런 상쾌한 시도 있구나! 생략된 앞부분에서 원래 이 시는 ‘안녕, 로키에!/ 시간이 째깍째깍 성냥을 그을 때마다 상점 불빛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어/ 지난날은 마술과 같았지’로 시작된다. 읽다보면 ‘로키에’가 누군지 궁금해진다. 시가 진행되면서 시적 화자는 수많은 일들이 수없이 피고 진 자신의 지난날을 그야말로 마술처럼 떠올린다. 그러나 실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목소리. 더욱 아름다울 수 있었는데, 로키에, 너와 함께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슬픈 예감 속에서 이 시는 결국 외롭고 쓸쓸하게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 모든 기쁨과 슬픔에 자신의 전부를 던져 수만 조각으로 부서졌어도 그것이 유쾌했다고 말하는 목소리는, 시의 끝에, 로키에가 결국 시적 화자의 ‘영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상한 희망으로 끌어올려 진다. ‘사랑해 로키에. 너는 나의 또 다른 이름. 나는 더 부서질테지만 그래도 더 가 볼래.’ 그런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소리내어 마지막 구절을 읽다보면, 거기에 마음을 실어보면,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일지도 모르겠다고 처음 느꼈던 그 여자친구와는, 지금 한 집에서 바나나의 소설을 아껴가며 나눠 읽는 사이가 됐다.

필자: 박상수 시인ㆍ문학평론가ㆍ문예창작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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