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삶과 삶이 만나 마음을 재활하는 시간 _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1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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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삶과 삶이 만나 마음을 재활하는 시간 _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1122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0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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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딱 그 자리, 그 시간에 발이 묶인 채 어쩔 줄 몰라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빈자리를 확인하고 상실감에 젖어 바닥에 축 늘어져 있다. 그래도 먹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가끔 웃고, 자주 울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상실의 시간과 상실을 극복하는 시간은 보통 시간과 달리 느리고 더디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 속을 유영하듯 흘러가는 것이 유일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인 것 마냥 시간 위에 둥둥 떠 있거나 끊어진 시간 저편에 망연자실 멈춰 서 있다.

화창한 봄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도경을 잃은 명지(박하선 분)는 마음을 달래려고 폴란드로 훌쩍 떠난다. 같은 사고로 단짝 친구인 지용을 잃은 해수(문우진 분)는 일상을 살면서 정성껏 지용의 누나를 돌본다. 김희정 감독의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사람을 잃고 시간에 갇힌 사람들이 삶으로 삶을 극복하는 이야기다. 영화는 같은 사건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었지만 각자 다른 시간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극복하는 주인공의 현재를 보여주기 위해 명지와 해수를 한 번도 같은 화면에 담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 같은 친구를 잃은 각각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각자 다른 마음을 들여다본다.

지독한 상실감 속에서도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슬픔을 내려놓는다. 죽을 만큼 힘들어 바닥을 기더라도 진짜 죽지는 않는다. 당장 죽어버릴 듯이 숨이 막혀도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삶이란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품어야 한다. 영화 속 지용의 누나는 갑작스러운 신체 마비를 겪고 움직이기 위해서 재활 훈련을 한다. 망가진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재활하듯, 망가진 마음에도 재활이 필요하다. 각자 상실을 극복하는 각자의 이정표를 따라 걸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

사실 애를 써도 상실의 아픔을 완전히 지우고 비워낼 수는 없다. 원하지 않는 순간에 온몸에 퍼져가는 피부병처럼 나아질 때까지 정성을 다해 들여다보고 약을 바르고, 괜찮아졌는지 확인해야 한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버튼을 누르면 한 번에 휩쓸려 내려가 버리는 것 같지만 다시 채워지는 변기의 물처럼, 우리는 마음을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채우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사람으로 살아질 수 있는 법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광주와 바르샤바 역시 민간인 희생자가 아주 많은 곳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그리고 백화점, 지하철, 다리, 바다, 골목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고 아주 많은 눈물을 쏟았다. 사고로 사람을 잃은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모두의 상흔으로 남은 그 사건들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언급하지 않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재난들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적 메시지보다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역사에 숫자로 기록된 덩어리가 아니라 각자의 이름을 가진, 각자의 가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삶과 삶이 만나는 시간을 소중하게 바라본다.

마음의 재활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배려의 마음이다. 깊은 우물 안에 갇힌 사람에게 넓은 세상을 보라고 다그치지 않는 배려. 빽빽한 나무 사이에서 있는 사람에게 숲을 보라고 다그치지 않는 배려. 텅 빈 마음이 안타까워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르기 전, 그가 앞서 깨어져 있었음을 인정하는 배려. 그리고 더디고 느린 걸음을 가진 사람의 팔목을 끌어당기거나, 빨리 가라고 떠밀지 않는 배려. 이제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 배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오래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 앞으로는 누구도 희생되지 않게 진실을 밝혀주는 배려.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배려. 그래야 마음의 얼룩이 표정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잠깐 서서, 잠깐 안도하며 오늘은 나도 좀 살아야겠다, 숨 좀 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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