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나도 당신의 가족입니다_영화 〈이장〉 〈1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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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나도 당신의 가족입니다_영화 〈이장〉 〈1121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3.10.10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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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나의 누나, 언니, 여동생, 엄마, 아내, 누구라도 괜찮다. 나의 가장 소중한 가족, 그중 여성인 나의 가족이 남들 앞에서 온갖 시중을 혼자 들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고 상상해 보자. 모두 웃고 떠드는 시간 내내, 제 끼니도 못 챙기고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지난 명절, 아주 많은 사람이 북적북적 당신의 집을 채운 그때, 당신의 엄마, 당신의 아내, 당신의 누나, 또는 여동생, 그리고 당신의 며느리는 가족 모임의 어디에 있었는지, 그 모임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정승오 감독의 다양성 영화 〈이장〉은 4명의 누나와 막내이자 장남인 남동생, 5남매가 아버지의 이장(移葬)을 위해 떠나는 아주 짧은 여행을 통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부장제의 여러 답답한 현실과 달라져야 할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는 아주 다양한 여성과 그들의 입장이 담긴다. 홀로 아들을 키워야 하는 첫째 혜영(장리우 분)은 육아휴직을 신청했다가 퇴사 권고를 당하고, 둘째 금옥(이선희 분)의 남편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셋째 금희(공민정 분)는 결혼 자금이 부족해 힘들어하고, 성평등 운동을 하는 넷째 혜연(윤금선아 분)는 세상과 남자들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싶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버티기가 힘들다. 와중에 책임감 없는 막내아들 승낙(곽민규 분)의 여자친구 윤화(송희준 분)는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상태다.

말로는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막상 가장 가까운 곳에,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이장〉은 아직도 저런 일이 있냐고 되묻기보다, 아직도 우리가 이런 세상 속에 살고 있구나, 새삼 깨치게 하는 영화다. 여전히 가족 모임에서 장남 혹은 장손은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사람이라 흔히 생각한다. 제사 음식은 여성이 차리지만 제사상에 절은 남성들만 하는 유교 문화가 습성이 되어 남아 있고, 오랜 시간 우리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제까지 비틀어진 세상은 굴곡된 시선을 고쳐가는 사람들 덕분에 조금씩 평평해졌다. 그리고 평평해진 거울은 세상을 바른 모습으로 비춘다. 〈이장〉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현재형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말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 모두 모른척하지 말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장〉은 자신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가부장제에 젖어 있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철없는 막내아들을 꾸짖거나 탓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바른 방법을 배우지 못한 가여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저 모르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고 조용히 다독이는 목소리는 낮지만 강직하다.

“며느리가 생기면 유학파인 사람도 유교파가 되는 게 한국의 시부모들이야”라는 영화 속 대사는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남들 앞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도 이상하게 가족들을 차별하고 단속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댁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차별받고 있는 여성들이 사실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의 가족이라 생각하면 변화의 시작도 조금 쉬워질 것이다. 소란스럽게 아버지의 묘지를 이장하다가 결국 장남은 사고로 다쳐 병원에 실려 가고, 장녀 혜영이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 장면은 무척 커다란 상징적인 변화처럼 보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휴대폰 속에는 딸들에게 보내려다 보내지 못한 문자가 남아 있었다. 마당에 꽃이 피었다며, 항상 자랑스럽고 잘해줘 고맙다고 쓴 글 끝에 동백꽃 사진이 담겨 있었다. 유령처럼 아버지는 아직 떠나지 않고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눈썰미가 좋은 관객들만 발견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인데, 가족들이 머물던 휴게소, 매표소, 화장터에는 같은 할아버지가 유령처럼 등장하는데 돌아가신 남매의 아버지인 것 같다. 이장과 함께 금기처럼 여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었던 큰딸의 제사상을 받았으니 아버지도 맘 편히, 가부장제의 유령과 작별하고 홀가분해지지 않았을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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