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패륜의 기원과 악의 탄생 〈1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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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패륜의 기원과 악의 탄생 〈1121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10.10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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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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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범죄자라도 세세한 사연과 가련한 처지를 깊이 알게 되는 순간 동정이 가게 마련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저지른 범죄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그 범죄가 막다른 길에 내몰린 존재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범한 순간적인 실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적 처벌은 면하게 해주지 못할지라도, 복잡한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누구나 안쓰럽게 여기며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1994년 5월 19일 벌어진 존속 살해 사건의 범인 박한상은 당시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나 동정을 얻지 못했다.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는 듣도 보도 못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천인공노할 일이라며 분개했다. 박한상 살인은 ‘패륜(悖倫)’이라는 생소한 어휘를 사회적으로 통용되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패륜’은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다는 상상 못 할 범죄를 설명하기 어려웠던 당시 언론이 찾아 꺼내든 단어였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천륜과 인륜이 이리 무너질 수 있느냐면서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한상 존속 살인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준인 100억대 재산을 지닌 강남 부유층 가정에서 일어난 친족 살인 사건이었던지라 큰 화제가 됐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 가리지 않고 연일 머리기사로 다뤘으며, 박한상의 얼굴과 이름은 일약 전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범죄 행위가 모두 드러나 구속된 뒤에도 반성하지 않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물론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가족 간 불화가 박한상을 비뚤어지게 만들었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수사와 재판 같은 요식 행위를 그만두고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죄자 박한상을 무조건 사형시키라는 주장이 힘을 받을 정도였다.

박한상은 존속 살해 및 현주 건조물 방화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런 수준의 범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 진실을 마주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박한상을 비난했다. 경찰 조사와 호송 과정에서 취재 경쟁에 나선 기자들을 향해 박한상이 막말과 욕설을 하는 장면이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그대로 나가자 사람들은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반성의 기미도 갱생의 여지도 없던 범죄자 박한상은 모든 사람에게 ‘악의 화신’이자 ‘패륜의 대명사’로 불렸다.

박한상 살인은 부모와 자식 간의 도의와 상례가 더 이상 지켜지기 어려운 사회가 도래했음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자애롭게 대한다는 신화는 처절하게 붕괴했다. 안타깝게도 박한상 사건은 아무런 전조 없이 일어난 공교로운 사태가 아니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실상 인간의 역사와 맞먹는 두께를 지닌 도리였지만, 이제 사회가 각박해지고 탐욕이 보편화되면서 존속 간 범죄는 언제고 돌연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됐다.

실제로 이 사건 이전에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비정한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가난을 견디기 어려워 자식을 죽이거나, 권력과 돈을 탐해 부모를 죽이는 자식의 사례는 동서고금에 넘치도록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발생했던 존속 살해 사건은 언제나 전례 없던 끔찍한 범죄로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두터운 믿음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리는 참혹한 세계의 출현을 애써 외면하거나, 가능하면 들춰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한상 존속 살인은 최초로 벌어진 패륜 사건이라기보다, 우리가 끝내 지키고 싶었던 윤리가 붕괴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출발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박한상 사건을 통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어왔던 윤리 규범이 이제 더 이상 사회의 도덕률로 엄격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부모는 자식을 완전히 소유할 수 없고,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박한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도리를 더 이상 상식으로서 기대할 수 없게된 사회가 시작됐음을 예고했다. 즉, ‘효(孝)’와 ‘예(禮)’를 법제화하고, 부모와 자식 간의 몫과 역할을 공적으로 규정해야 하는 시대가 본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 사건 이후 “나는 유산이 없어 자식에게 살해당할 위험도 적다”는 농담이 씁쓸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진 것도 괜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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