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반칙은 나의 힘 〈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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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반칙은 나의 힘 〈1120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09.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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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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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청년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실상 그들의 자녀들만 온갖 반칙과 특권을 활용해 이익과 자리를 독차지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좌(左)와 우(右)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같은 종(種)으로 묶이는 것은 이런 면모들이 보여주는 공통성 때문이겠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차별과 불공평에 불만을 표할 때,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되길 바라는 절실한 심정인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오히려 우리들은 스스로가 그런 특혜를 누리지 못하는 비루한 처지에 있음을 한탄하는 경우가 더 흔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보통의 존재들이 느끼는 정서적 건조함의 근원은 특권과 반칙이 횡행하는 현실을 어쩌지 못하는 부박함 속에 도사리고 있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메마른 인식과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마냥 나무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사로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얻은 삶의 교훈이란 게 권선징악보다 삿된 사람들이 잘먹고 잘사는 현실을 목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반칙과 사기를 업으로 삼는 자들은 대대로 잘 먹고 잘살았다. 세도가가 그랬고, 친일파가 그랬다. 그들은 지탄받고 욕을 먹더라도, 더 좋은 것을 걸치고 주름 없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직하게 살며, 나쁜 마음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고생을 많이 하고 가난한 경우가 많다. 암담하고 참혹하다. 도덕의 역설이자 믿음의 배신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이렇게 사기가 판치는 나라가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기는 늘 존재해 왔겠지만 현대적인 금융사기, 즉 기업과 개인들로부터 돈을 끌어 모아 한탕 크게 털어먹은 사기의 원조는 장영자를 들 수 있다. 그녀는 1982년 당시 우리나라 국민총생산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인 7,1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사기 쳤다. 당시 근로자 평균 월 급여가 10만 원 안팎일때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수십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장영자만 믿고 거액의 어음을 발행해 자금을 빌려 썼던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총 여섯 곳의 기업이 파산 혹은 부도가 났고, 장영자의 어음 유통에 관여된 수많은 개인 채권자의 돈도 한순간에 묶여 버렸다. 사기꾼 장영자 때문에 여러 기업과 은행, 수많은 채권자가 모두 한순간에 망하게 됐다. 장영자는 사기로 획득한 돈의 일부는 뇌물로 사용하고, 또 일부는 달러로 돈세탁을 거쳐 미국에 있는 부동산을 샀다. 장영자의 금융사기 레퍼토리와 돈 처분 방식은 이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패턴이 됐다. 과연 금융 사기꾼의 선구자(?)다운 면모라 할 수 있다.

장영자가 저지른 금융사기는 정경유착의 폐해와 관치금융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사기꾼 장영자와 함께 불법을 감행하고 권력에 야합한 기업 총수, 은행장들이야 응당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이들이 운영하던 기업체에 소속된 노동자들과 못 먹고 안 입어가며 은행에 생때같은 돈을 저축했던 국민들이 입은 피해는 산술적으로 따질 수조차 없다. 장영자 사건 이후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서민들의 아픔은 그 누구도 어루만져주지 않았다.

장영자 사건은 고도성장 시기 한국 기업과 은행 사이의 비이성적 금융 거래 관행과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던 사기꾼들의 실체를 폭로했다. 한국의 기업들은 정권에 밉보이지 않기 위해서 권력자와 연줄이 닿아 있는 사람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기업 역시 수많은 불법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정권은 이 사건을 온당하게 수습하기는커녕 불똥이 최고 권력자에게 번지지만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장영자가 전두환 대통령 처삼촌의 처제였기 때문이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장영자는 저지른 사기 범죄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 징역 15년 형량을 받았고, 심지어 이조차도 감형돼 1993년 십 년 만에 가석방 출소한다. 이후 장영자는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사기 행각을 이어갔고, 지금까지도 계속 감옥을 드나들고 있다. 장영자 이후 ‘조희팔’, ‘굿모닝시티’, ‘나라종금’, ‘주가조작’ 같은 나라를 뒤흔드는 사기 사건은 잊을만하면 또 터져 나왔다. 경제사범이나 사기꾼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후과이다. 아니면 이런 사기 사건들과 내밀하게 관계된 힘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 말대로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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