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스즈메, 물단속도 부탁해 _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1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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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스즈메, 물단속도 부탁해 _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1119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11 17: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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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살짝 기울어지는가 싶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부활시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지나온 일본의 반성처럼 보이지만 사실 반성보다는 추모에 이야기가 기울어져 있는, 그래서인지 역사적 맥락에서 개운하지 않은 영화였다. 폐허가 된 시공간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채 사라져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식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과거의 문제를 단단하게 봉인하고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게 살자고 전하는 메시지는 묘하게 한일 관계의 청산되지 않은 이야기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꽤 오래, 그리고 정성껏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인간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영화다. 소녀 스즈메가 어느 날 열어버린 문을 통해 마을에는 재난의 위기가 닥쳐온다. 가문 대대로 문 너머의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와 함께 간신히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통해 마코토 감독은 재난을 추모하고,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방식으로 일종의 위령식을 펼친다. 과거를 지우고 현재를 지키는 일이 굳이 미래를 위한 일이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묘하게 일본은 과거를 청산하기보다는 감상에 빠지는 방법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역사가 증명하듯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를 기어다니는 유령 같다. 그리고 그 유령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그림자처럼 그늘을 지운다.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역사적으로 청산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를 꼬리처럼 달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역사를 통해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처럼 굴고 있다. 사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과 중국을 무력으로 짓밟은 역사적 악행 이후에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해양환경은 물론 사람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결국 한국과 중국을 향해 뻗어있는 바다에 오염수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살짝 잊혀진 것 같아 다시 환기하자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불과 십수 년 전인 2011년 일본 동북부를 관통한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원자력발전소 방사능이 유출된 사고를 말한다.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동일한 등급의 사고라고 기록되었으니 그 사회적 여파는 엄청난 것이었다. 후쿠시마 토양은 오염되었고, 방사성 물질이 바람을 타고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유럽, 중국에서까지 검출될 정도로 심각한 사고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트라우마는 흉터처럼 우리에게 남았는데, 일본은 다시 바다에 핵 오염수를 방류하기로 결정했다.

예술은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 걸까 질문하게 된다. 환경오염에 지속적인 관심과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일본의 예술과 전 세계를 향한 테러에 가까운 오염수 방류를 택한 일본의 정치는 그 간극이 너무 커 보인다. 아주 오랜 역사적 망언과 폭력을 사과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이 저지른 오염수 방류는 먼 미래, 또 어떤 기록으로 남을까? 그리고 그들의 잘못을 두 눈 뻔히 뜨고 묵인하고 있는 우리를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개인의 삶은 유한하지만, 그 시간들이 이어진 우리들의 미래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그 시간의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삶을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스즈메의 문단속〉은 다녀왔습니다, 라고 화답할 수 있는 현재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지만, 우리는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나눌 수 없는 미래를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는 청산되지 않은 과거처럼 우리의 미래도 의뭉스럽게 뭉개버리기 때문이다. 스즈메라는 아주 용기 있는 소녀가 진짜 일본에 있다면, 감상에 젖어 문단속만 하지 말고, 진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물단속도 꼭 해달라고 빌어보고 싶다. 하지만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방치된 채 망가져 버린 아이들과 그들이 숨 쉬며 살아야 하는 대자연의 미래는 그 어떤 마법으로도 구원할 수 없을 거란 걸 스즈메도 알고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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