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남들처럼 단단한 벽을 가진 집, 흩어지지 않고 함께 살 수 있는 그런 집 한 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보호받지 못하는 가난, 누구도 맞서주지 않는 차별 속에 들어선 사람들의 상황은 절대 볕이 들 것 같지 않은 쥐구멍 속 구멍 같다. 세상은 그들에게 안락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 시간, 하루, 한 달이 쌓여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1초, 1초, 1초를 견디고 생존해야 하는 순간, 달아나려 하지만 결국 절망이라는 구덩이에 더 깊이 침잠한다.
이솔희 감독의 영화 〈비닐하우스〉는 벼랑 끝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은 바람 하나로 버티는 문정(김서형 분)을 중심으로 우리가 소위 ‘사회적 약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동그랗게 이야기 속에 불러온다. 영화는 싱글맘, 치매 환자, 독거노인,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 홈리스, 장애인 그리고 돌봄 노동자 등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회의 갖은 문제점들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이 꼭 하우스가 아니지만 하우스라는 이름을 지닌 비닐하우스처럼 위태롭다는 것이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애를 쓰면 쓸수록 더 옥죄는 덫처럼 문정의 인생은 불행이라는 파국을 향해 보다 깊이 가라앉는다. 문정의 불행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엔딩은 다소 과하고 작위적이라 아쉽지만, 그렇기에 극악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보지 않으려 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조금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자는 메시지는 꽤 날카롭고 또렷하게 울린다.
앞뒤 이야기를 도려내고 문정의 주위를 담아내는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처럼 감정이나 소동이 없다. 시간과 사람들이, 추위와 무관심이 문정을 꽁꽁 얼려버리는 것 같다. 그렇게 보고 있자면 관객들의 정서도 서늘하게 얼어버린다. 〈비닐하우스〉에는 목욕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씻고 씻기는 장면 속 씻고 또 씻어도 깨끗해지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를 떠도는 삶의 무거움은 켜켜이 쌓인, 오래 묵은 때가 되었는데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타인을 비난하거나 동정할 권리는 없다. 가난과 시간의 착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약자들이 근근이 꾸려가는 삶을 함부로 동정하지 않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비극적 정서에 휘둘려 정서적 학대로 이어지지 않는 것 역시도 무척 중요하다. 사람들은 약해서 끝내 악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단죄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희망을 품으면 무작정 나아지리라는 거짓 위안을 품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이의 죽음은 상실이 아닌 구원이 된다. 애써 이어가는 삶의 끝, 생존을 택할지 존엄을 택할지 선택만이 남는다. 문정이 대표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비극은 영화 속에서 심하게 그을린 채로 남겨지지만, 우리의 세상에는 어떠한 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영화는 불타 버린 비닐하우스처럼 문정의 미래를 방치한다. 고아는 아니지만 고아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오도카니 홀로 남겨졌을 때, 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설명이 부족하지만, 비극에는 너무 진심인 서사는 불친절한 우리의 삶처럼 작정 없이 직진한다.
감정이 결여된 카메라는 문정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카메라의 가장 충실한 역할은 문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에 가두는 일이다. 영화는 숨이 턱 막혀 멈춰 선, 더 큰 비극을 앞두고 선 문정의 다음 이야기를 한없이 열어둔다. 문정은 아직 알아채지 못한 비극을 관객들에게만 털어놓으며 끝난다. 문정의 표정과 숨결, 다가올 더 큰 비극을 알아채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 우리 옆에서 이어질 것만 같다. 월컹대다가 뚝뚝 멈추는 어떤 삶은 그렇게 꾸역꾸역,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