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제76 포로수용소 〈1103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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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제76 포로수용소 〈1103호(종강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2.05.30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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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1950년, 그해 장마는 6월 20일경 시작되었다. 25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새벽 4시경 야음을 틈타 38선 전역에서 소련제 T-34 탱크를 수십 대씩 앞세운 북한 인민군 9만여 명이 남쪽으로 밀어닥쳤다. 아직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천둥인지 대포 소리인지 구별되지 않는 포성이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기에 맞선 대한민국 국군은 화력에서 북한 인민군에 비하면 비대칭적 열세로 38선 모든 전선에서 M1 소총으로 고군분투했으나 남하하는 탱크를 멈춰 세울 수 없었으므로 처참하게 붕괴돼버렸다.

그러나 소양강 북쪽 지역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38선을 지키던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종오 대령의 한국군 제6사단은 용전분투하였다. 특히, 사단 포병대는 춘천 북쪽 화천에서 남하하는 인민군들을 강타해 인민군 제2사단 병력의 40%를 도륙하는 전과를 올렸다. 평시에 전투훈련에 충실한 군대의 전형을 실감할 수 있는 승리였다. 당시 춘천 지역을 공략한 인민군 제2군단의 작전 참모였던 이학구 대좌(국군의 대령과 같은 계급)는 인민군 전체에서 작전장교로 이름났던 존재였으나 이 작전에서 실패한 후 행방이 모호해졌다.

그해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이북으로부터의 보급선에 허리가 잘린 인민군이 낙동강 교두보 일대의 전선에서 유엔군의 반격으로 붕괴돼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낙동강 교두보 일대 전선에는 미군 탱크 400여 대가 투입되어 인민군을 궤멸시켰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사면 일대에 포진했던 인민군 제13사단 5,000여 명 병력은 백선엽 장군의 국군 제1사단의 집중포화를 받고 상주 쪽으로 1,500여 명이 도망갔으나 실질적으로는 전멸한 상태였다.

그런데, 9월 21일 이른 새벽 먼동이 터 오던 시각, 경상북도 다부동 주둔지에서 인민군 고급 장교 한 사람이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미군 제8 기병 연대본부로 소리 없이 잠입해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미군 병사들을 깨워 손을 번쩍 들어 항복했다. 이 사람이 바로 인민군 대좌인 이학구이다. 그를 포로로 잡은 사실을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미 8군 사령관 마크 W. 클라크(Mark W. Clark) 중장이었다. 그는 유엔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에게 감격적인 어조로 “지난 8월 26일 대전전투에서 인민군의 포로가 된 딘 소장과 교환할 수 있는 인민군 대좌를 사로잡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학구는 훗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으면서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조직해 그 집단에서 군림함으로서 포로 교환 시 유엔군 입장에 치명타를 준 장본인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1951년 6월까지 거제도 ‘76 포로수용소’에는 인민군 포로 13만 명과 중공군 포로 2만 명이 수용돼 있었다. 1952년 초부터 휴전 협상이 시작되면서 유엔군 측에서 포로들을 심사한 결과 공산군 포로들 중에서는 모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이들은 반공포로로 분류되면 자유 선택의 길이 있음을 알고 송환을 반대하는 혈서를 써서 의사표시를 하거나 반공이라는 표어를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도 있었다. 반공포로 중 인민군 5만 명과 중공군 1만 5천 명이 모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 친공(親共)포로 측의 협상대표단은 공산군 포로 심사를 중지시키기 위해 수용소 안에서 멋대로 인민재판을 열어 반공포로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또한, 모든 포로들을 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공산주의 사상교육도 시켰다.

이어 반공포로 심사를 중지시키기 위해 대담한 작전을 계획하고 76 포로수용소 소장인 프란시스 T. 돗드(Francis T. Dodd) 준장을 교묘하게 포로수용소 정문까지 유인해 협상을 하는 척했다. 그러나 미리 오물처리반 친공포로들이 밖에서 작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수용소 정문을 열도록 계획하고 이들은 일시에 소장을 납치해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제76 포로수용소 소장납치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부터 수용소 철조망에는 북한 인공기가 곳곳에서 펄럭이기 시작했다. 친공포로 지도자들은 조직을 강화해 소규모의 북한을 수용소 안에 재건했다. 당시 거제도에는 한국군 3천 명, 미군 8천 명 도합 1만 1천 명의 무장 군대가 주둔해 있는 가운데 납치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돗드 준장의 리더십의 문제가 어떠했는가를 상상케 한다.

76 포로수용소에 새로 부임한 콜슨 준장에게 보내온 ‘조선 인민군 및 중화인민 의용군 포로 대표단’이라고 서명된 돗드 준장 석방조건을 간추리면 “북조선 인민군 및 중화인민 의용군 포로들의 불법적 자유 송환 계획을 즉시 중지할 것, 불법적인 강제 심사를 중지하고, 친공포로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승인하고 긴밀히 협조해 줄 것, 본 대표단은 상기 문제 해결을 위한 만족할 만한 서면 답변을 받은 후 돗드 준장을 귀관에게 인도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휴전협정에 의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부터 북한으로 송환된 공산군 포로 대표단을 이끌었던 이학구는 1963년 북한에서 어떤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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