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칼럼] 예술의 ‘쓸모’ 〈1093호〉
상태바
[명진칼럼] 예술의 ‘쓸모’ 〈1093호〉
  • 정혜윤 예술학부 교수
  • 승인 2021.10.11 0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혜윤 예술학부 교수hychung@mju.ac.kr
정혜윤 예술학부 교수hychung@mju.ac.kr

일찍이 1997년 핑커(Steven Pinker)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음악은 그저 ‘청각적 치즈케이크’에 불과하다고 단언한 바 있다. 음악은 진화론적으로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이 대담한 발언이 당시에 불러일으켰던 커다란 파장은 20여년이 라는 세월 동안 이 견해가 널리 알려진 만큼이나 이제는 상당히 잔잔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핑커의 이 주장을 여전히 불편해 한다. 이는 음악이 치즈케이크처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것’, 혹은 ‘단순한 쾌’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기꺼이 동의하기가 꺼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 감각적인 즐거움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싶어 하며, 그렇 기에 예술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일찍이 19세기 독일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오직 음악만이 유한하고 감각적인 현상계에 구속됨 없이 초월적인 물자체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음악에 언어보다도 높은 인식론적 지위와 가치를 부여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쇼펜하우어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더 이상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 무엇인가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평범한 일상사와는 거리가 먼 것일 것이라고 부지불식간에 여긴다. 소소한 일상을 초월하여 예술이 갖는 그 가치에 집중하기 위해 우리는 먹던 빵을 가방 속에 집어넣고 마시다 남은 커피를 포기한 채 연주회장과 전시회장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일상사의 모든 현실적인 관심에 문을 닫고 칸트가 제안한 무관심적인 태도로 예술작품을 관조한다. 뒤샹이 주물공장에서 대단위로 생산된 남성용 변기들 중 하나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전시회장에 내놓고 예술계가 이것에 예술 작품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한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일용품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것과 예술의 주된 가치를그 일상적인 용도에서 찾는다는 것은 전혀 무관한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예술의 중심 가치가 일상적인 쓸모를 넘어서 있다고 믿는다. 예술의 용도를 쾌로 환원해 버리는 핑커의 발언이 불편한 것도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이 갖는 일상적인 쓸모가 치즈케이크가 선사하는 바와 같은 쾌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또한 일상적인 쓸모가 반드시 높은 가치와 거리가 먼 것일 필요도 없다. 오늘날 일군의 철학자들, 인지과학자들은 예술이 우리를 인지적으로, 그리고 정감적으로 지지해줌으로써 우리가 인지적, 정감적 활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말한다. 인간은 출생 시부터 계속해서 자신의 정감적 상태를 스스로 조정하고 규제해야 할 부담을 지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정감적 과제가 때로 버거울 때 예술의 도움을 받아 이 과제를 해결한다. 가령 긴장감과 초조함에 마음을 가눌 길이 없을 때우리는 음악을 골라 듣는다. 그리고 스스로 통제 하기 힘들었던 불안감이 차츰 해소됨을 느낀다.

데노라는 음악의 이러한 역할에 주목하여 음악을 ‘미적 테크놀러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술 감상 시특정한 정감적 경험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항우울제나 안정제를 통해 특정한 정감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절차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항우울제나 안정제가 우리 몸에 변화를 초래하여 우리를 특정한 정감적 상태에 이르게할 때, 이들이 예상되는 효과를 일으키게 하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해야 할 일이란 없다. 반면 음악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이렇지 않다. 인간은 청취 경험을 그저 ‘겪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창출해 나간다’. 즉 청취환경을 선택하고 청취행동을 결정하며, 청취내용을 구성해 냄으로써 자신의 경험이 특정한 양상으로 빚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약물은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작용하지만 예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예술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예술과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된다. 가령 음악은 인간과 소리 사이의 상호작 용을 가능하게 하는 풍성한 물질적인 자원을 제공하며, 인간은 음악이 제공하는 소리자원들에 잠재되어 있는 역량들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활성화한다.

음악이 인간을 정감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음악의 잠재적 역량들이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정감적 상태가 조율되는 방식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무거운 초월적 형이상학이나 한갓 쾌에 호소하지 않은 채로도 예술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예술이 갖는 가치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예술의 일상적 쓸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예술에 더 진지한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