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호동왕자 이야기 〈10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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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호동왕자 이야기 〈1092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1.09.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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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sikuwn@ks.ac.kr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 · 2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부러진 칼의 반쪽을 찾아 졸본 땅으로 가서 고주몽의 태자가 된다. 그가 동부여에서 자랄 때 절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금와왕의 일곱째 왕자이었지만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유리왕 33(AD14)년에 제3왕자 무휼을 태자로 봉했는데 이때 태자 나이는 11세였다. 유리는 동부여에서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고 있었을 때 물심 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준 일곱째 왕자의 손녀를 태자의 둘째 왕비로 삼아 국내성(지금의 만주집안 · 輯安)으로 데려왔다. 후에 일곱째 왕자는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 5(AD22)년 고구려에 의해 부여가 멸망한 후 압록강과 동가강이 만나는 곳, 즉 압록곡에 대무신왕의 후원으로 갈사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이 갈사왕의 손녀이다.

대무신왕 9(AD26)년에는 국내성에서 남으로 압록강을 건너 개마고원 일대에 있던 한사 군의 하나인 임둔군의 개마국(蓋馬國)을 친정하여 왕을 죽이고 그 땅을 고구려의 현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중국 한나라의 전유물이었던 철제 무기가 고구려에서도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먼저 한반도 안의 한사군에 대하여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평양성을 도읍으로 한 낙랑군 이외에 진번 · 임둔 · 현도 3군은 이미 유명무실 하게 퇴보되어 있었고 오직 낙랑군만 번창하 였다.

후한서 『군국지(軍國志)』의 낙랑 군조를 보면 당시 낙랑의 규모는 ‘18성(城), 인구는 257,000명’이다. 이 기록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때쯤 한반도의 전체 인구는 총 50만 미만으로 추정된다. 당시 낙랑지역은 한나라로부터 문화가 직수입되어 가장 문명이 앞선 곳이었으므로 인구밀도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중국 대륙의 후한과 맞서기 위해 우선 낙랑을 합병하고, 그 국력으로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을 흡수하여 극동지역의 패권을 갖는 것이 목표였다. 항구적으로 고구려가 한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넘어야 할 과제였다.

대무신왕 15(AD32)년 꽃피는 4월 왕자 호동이 낙랑군의 관할지역인 임둔군의 옥저 지방 (현 함흥지역)을 정탐하기 위해 몇 명의 병사를 데리고 잠입했다. 낙랑군의 태수인 최리(崔理)가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임둔군 일대를 살펴 보기 위함이었다. 호시탐탐 옥저 땅을 노리던 고구려가 최리의 대항마로 호동을 때맞춰 이 지역에 파견한 것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호동은 며칠 동안 은밀히 최리의 동태를 살핀 후, 현 함흥 부근의 어떤 산록에서 드디어 몸을 드러내 대면의 기회를 만들었다. 두 사람은 피차간에 적의 동태를 더 캐내기 위해 수일간 더불어 사냥을 진행하며 대화했다. 최리는 낙랑군이 옥저 지역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무신왕의 양해를 얻어야 했으므로 대리자인 호동을 평양으로 유인해 자기의 딸과 혼인시켰다고 한다. 장차 낙랑군까지 탈취하려는 대무신왕과 저물어가던 낙랑군을 유지하려던 최리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이 사실을 허구라 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중국 후한의 광무제(AD25년)때 기록된 후한서 『왕경전(王景傳)』에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낙랑군에서는 예맥족인 왕조(王調)란 사람이 도당을 규합하여 중국인 낙랑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 태수라 자칭한 사건이 벌어졌다.

『왕경전』에 의하면 왕조는 토인이라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가 토착 본주민(예맥족)인 것은 알 수 있으나 반란의 동기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다.

필자는 광무제가 후한을 세우는 과정의 혼란기를 틈타 왕조가 예맥족의 독립 세력을 규합하여 낙랑군을 축출하려는 시도였다고 판단한다. 반란의 연대는 대략 광무제가 왕망(王莽)을 축출하던 시기인 AD 25~29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어찌되었든 왕조란 인물은 낙랑군을 장악하고 후한을 적대시했다고 기록돼있다. 그러나 왕조는 광무제 건무 6(AD30)년 한나라에서 새로 파견한 낙랑 태수 왕준(王遵)에 의해 타도됐다. 본래 낙랑 태수의 임기는 종신으로 세습되었으므로 최리라는 인물이 AD 32 년 옥저 지역을 살펴보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대무신왕에 관한 기록을 종합하면 왕이 장차 임둔군의 옥저 지방을 병합할 야심으로 당시 나이 18세 왕자를 적진으로 파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애틋한 사랑 얘기와 적군이 낙랑성에 접근하면 자동으로 울린다는 자명고와 짐승의 뿔로 만든 나팔소리는 픽션으로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문학적 주제 이긴 하다. 그러나 최리가 역사적 인물인 낙랑 태수가 아니라면 낙랑공주도 실제 인물이 아니므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가슴 저미는 애틋한 사랑 얘기는 공중에 흩어지는 하얀 구름처럼 허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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