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싯다르타와 목녀(牧女) 〈10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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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싯다르타와 목녀(牧女) 〈1091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1.09.12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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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法顯)은 승려들의 생활 규칙을 정한 율장을 구하기 위해 399년 3월경 서안을 출발하여 비단길을 따라 인도로 갔다. 그의 기행문 『불국기』에 의하면 싯다르타 태자가 성도한 부다가야에 도착한 것은 404년 8월 15일경으로 고구려의 광개토왕 14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법현은 태자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에 금강좌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 크기는 사방으로 180cm, 높이는 60cm 정도였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자는 이 큼지막한 돌에 의지하여 6년 동안 생활을 했고 드디어 깨우쳤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그곳 우르빈나 촌장의 예쁜 딸인 수자타(Sujata)의 음식 공양이 뒷받침된 것인데, 그 구구절절한 사연들의 많은 부분이 감추어져 있다.

태자의 출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정황을 살펴보면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난다. 출생으로부터 입적까지의 전기는 사실상 태자가 죽은 후 700년쯤 후인 쿠샨조시대 카니시카 왕의 제4 결집 때 논장(論藏)을 통하여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그 사실들이 퇴색되고 망각된 것이 많다. 여기에 부처님이 된 후 그 기득권이 보태져 윤색된 내용도 많다고 판단된다.

그가 태어난 카필라성은 황색인종인 석가족의 한 작은 나라로 인도 아리안들의 국가가 아니고 퉁구스족이 세운 나라였다. 그러므로 석굴암의 십대제자상 가운데 태자의 사촌인 아난, 아들인 라훌라, 이발사 우파리, 본존불*인 싯다르타의 부조로 된 초상을 분석하면 황색인 종의 얼굴로 묘사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눈의 모습이 그러한데 이런 사실은 신라인들의 의식적 개념이기도 하다.

이 석가족의 나라는 서쪽으로 코살라국 남쪽으로 마가다국 같은 대국과 인접해 있었음으로 군사적으로 풍전등화처럼 항상 불안한 입지의 작은 나라였다. 따라서 카필라성의 정반왕(태자의 부친)은 태어날 때부터 성장 과정을 통하여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태자의 천재성에 큰 기대를 걸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름조차도 싯다르타(소망을 이루어주는 사람)로 지었다.

유년 시절부터 부왕의 속마음을 알아챈 태자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절대자가 되기 위한 수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출가를 단행한 것이다.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와 부다가야지역 일대에는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을 사문(沙門:śramana)이라 불렀다. 태자는 부다가야 우르빈나 마을의 보리수나무 숲에 도착하여 수행을 시작했다. 그가 출가할때 나이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 글은 19세 출가설에 의거했다.

비록 분소의(糞掃衣)를 입었으나 빼어난 미남자의 용모와 궁정의 교양이 몸에 배인 카필라성의 왕자가 우루빈나 마을에 사문의 신분으로 온 것이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막연히 마음이 끌렸던 당시 12세 소녀 수자타 (Sujata)는 그 마을 촌장의 막내딸이었다. 태자는 출가하여 여러 스승을 섬겼으나 자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이곳에 와서 독자적으로 새로운 수련을 시작한 것이다.

태자는 끼마다 대마씨 한 알로 연명하며 고행으로 수련을 계속함으로 도리천을 다스리는 인도의 천신인 Indra(제석천)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몸에 지니기 위한 도를 닦았다. 인드라의 모습은 석굴암의 본존불이 안치된 주실 입구 오른쪽에 배치된 존상을 통하여 실상을 볼 수 있다. 인드라는 왼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금강저(金剛杵)를 작동시켜 번갯불을 일으켜 전략적으로 적진을 순간적으로 섬멸하는 능력이 있다. 이 인드라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한 연속적인 고행으로 태자의 얼굴은 해골이 드러날 정도로 여위어갔다. 이럴 때마다 수자 타는 우유에 쌀을 넣고 끓인 죽을 공양하여 죽음의 늪에서 태자를 건져냈다.

태자가 25세 되던 해인 12월 7일 황혼 무렵, 인드라가 번개를 일으키는 금강저 대신 돌 위에 깔고 앉을 예초(길상초)를 준비하여 태자에게 건네주었다. 인드라는 결국 그가 석가여래가될 것이라는 사실을 브라흐마(범천)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브라흐마는 석굴암에서는 인드라의 맞은편에 배치되어있다.

기원전 535년 12월 8일 샛별이 동녘 하늘에 빛날 때, 태자는 드디어 성도하여 석가여래가 되었다. 그러나 석가여래로 변신한 태자는 7일이 일곱 번 반복된 49일까지 수자타가 공양하는 양죽만 축내며 의지해왔던 금강좌를 중심 으로 서성이며 덧없이 세월을 흘려보내기만 했다. 태자의 속마음을 관심법으로 알아차린 브라흐마가 도리천에서 내려와 태자에게 불법을 포교해달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범천권청(勸請)’이다.

석가여래가 된 태자가 49일 동안 금강좌로 불리는 돌 주위를 맴돌기만 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려 6년의 세월 동안 우유죽을 끓여 태자를 공양해 온 수자타의 나이도 어언 꽃다운 나이 18세가 되어 있었다. 세월이 물같이 흘러간 후, 631년 당나라 구법승 현장이 이곳에 왔을 때이 검은색 돌(금강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본존불 : 으뜸가는 부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불’ 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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