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칼럼]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10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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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칼럼]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1089호〉
  • 주민재 교수
  • 승인 2021.08.2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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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목기초교육대학 주민재 인문교양 교수
방목기초교육대학 주민재 인문교양 교수

지난 광복절에는 친구 아버님 장례식에 다녀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어릴 적 그 친구 집에 가면 고인께 가끔 인사를 드리기도 했던 터라 장지까지 걸음을 하게 됐다. 장지에서 하관 예식을 보고 있자니 반년 사이에 친구들 아버님 장례식에 세 번이나 다녀온 것을 깨달았다. 세 분 모두 한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내실 정도로 훌륭한 어른들이셨고 어릴 적 우리들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문득 한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인 한 사람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라는 일본 속담 말이다. 그 속담대로라면 나와 내 친구들은 어느새 세 개의 도서관을 잃어버린 셈이다.

몇 년 전인가 수업 시간에 노인들이 예전과 달리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험적 지식을 중요시했던 농경사회에서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중요해진 산업 · 정보사회로의 변화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농업에서는 자연에 대한 오랜 시간의 축적된 데이터가 가장 큰 자산이다. 그러므로 농경사회에서 노인의 존재는 생산에 필수적인 데이터 그 자체가 된다. 수십 년 동안 언제 큰 비와 눈이 왔는지, 어느 해에 가뭄이 들었는지는 그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바다에 인접한 수많은 마을들이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중 한 마을은 노인 한 사람이 고집을 세워 마지못해 쌓은 방지벽 덕분에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노인은 100년도 훨씬 전에 일어났던 쓰나미로 인해 바닷물이 마을로 밀려 들어왔던 높이를 가리키면서 방지벽을 그 이상 쌓아야 한다고 우겼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건 옛날 이야기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라며 반대했지만 끝내 그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나 보다. 결과적으로 그 마을 사람들은 한 노인의 고집 때문에 쓰나미에서 살아남았고 마을 역시 온전할 수 있었다. 그 노인의 고집은 그 마을에서 누구보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다와 싸워왔던 경험의 결정체이자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나는 노인이라는 단어에서 종종 현자(賢者)의 분위기를 느끼고는 했다. 어쩌면 중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 때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노인이라는 말에는 연륜에서 오는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막연히 생각해온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노인’이라는 말을 꺼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노인이란 사전적으로는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이라는 말로 본래 어떠한 폄하의 의미도 없다. 하지만 늙음이 더 이상 지혜의 보고가 아닌 비적응과 돌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로 인해 노인이라는 단어가 긍정적 의미의 부차적 기의(記意)를 담지 못하게 되면서 모두 기피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요즘 노인이라는 단어가 쓰일 곳에 ‘어르신’이라는 말이 자리 잡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두 단어의 쓰임새는 엄연히 다르다고 여긴다.

장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생각했다. 세 개의 도서관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세 개의 도서관이 소멸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도서관의 소멸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면 그 도서관들이 소멸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책들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대로 소멸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우리가 가진 지혜가 너무 박약하다. 우리 사회 그리고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그러나 언젠가는 소멸하게 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말이다. 우리 사회가 도서관들과 그 안에 있는 수많은 책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순간순간 뼈저리게 느끼는 지혜를 갖게 될 때, ‘노인’이란 말도 더 이상 기피되는 단어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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