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을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열사는, ‘나라를 위해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스펙 강박증’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로 과도경쟁 사회로 내몰려 학점과 스펙에 갇혀있는 것도 모자라 최저 시급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빠듯하게 생활비를 벌고, 입학과 동시에 취업까지 걱정하는 대학생들에게(특히 신입생들에게) 1991년 봄에 스러져간 강경대 열사는 희미하다.
당시엔 노태우 군부독재 정권이 집권한 뒤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민주인사들을 억압했다. 그 수단 중의 하나가 사복경찰(사복 체포조)이었고 대표적으로 백골단이 있다. 백골단은 청바지, 청재킷을 입고 나타나 시위 참가자들 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했고, 독재의 상징이 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아 백골단 해체 요구는 더욱 커져 갔다.
한편 여러 대학에서는 일방적인 학사행정과 등록금 인상이 강행되고 있었다.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뤄지는 학사 운영에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학원 자주화 실현을 위해 학교를 상대로 집회를 이어갔다. 1991년 봄, 명지대학교에서도 학원 자주화 투쟁이 거세지고 있었다. 4월 26일에도 학내에서 집회를 열고 학교 밖으로 시위를 전개하던 도중 백골단이 투입 됐다. 시위 선두대열에 상황공유 역할을 맡았던 강경대 열사는 백골단의 출몰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위대열 선두로 향하던 도중 백골단에게 포착되었고, 현재는 신축개발 공사로 무너진 명지대학교 담장을 넘어가던 도중 붙잡혀 쇠파이프로 수차례 가격당했다. 곧이어 학생들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심장막 내출혈로 운명했다. 열사는 당시 1학년이었지만, 그가 쓴 일기를 통해 이전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해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거리에 무장한 사복경찰이 보이진 않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생명도 보장받지 못한 채 경제 위기를 몸소 책임지고 있는 노동자들부터, 미친 듯이 오르는 집값과 다르게 버는 돈은 얼마 쥐어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는 직장 인과 학생들, 전쟁 무기 도입과 군사훈련 강화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정권의 모습까지. 30년이 지났을지언정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1991년 강경대 열사와 수많은 학생이 외쳤던 ‘학원자주화’의 구호는 민주적인 총학생회가 설치되게 했고 강경대 열사 타살이 불러일으킨 ‘노태우 군부독재 정권 타도’의 외침은 그 당사자들을 심판했듯, 사회를 바꾸려는 목소리가 모여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명지대학교의 역사인 강경대 열사를 기억하며 함께 첫발을 내딛어보자. 열사가 염원했던 세상이 어땠을지 고민하고, 현존하는 사회문제에 대학생으로서 옳은 목소리를 보태보자. 그렇게 하다 보면 열사가 염원했던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곧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