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제66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쇼룸 (소설 부문 가작) 〈10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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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제66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쇼룸 (소설 부문 가작) 〈1081호〉
  • 김현주 학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0.11.3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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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티는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팬케이크를 해주겠다고 하더니, 혹시 토스트가 먹고 싶냐고 그녀는 물었다. 나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싼 채 아무거나 그녀가 먹는 걸 먹겠다고 말했다. 아직 아침이라 입맛이 완전히 돌지 않았고, 어차피 그녀의 요리가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았다.

 케이티는 팬케이크를 하기로 한 듯 팬트리에서 믹스를 꺼냈다. 나는 옆에서 사과를 씻었다. 작아서 자를 필요는 없었다. 대신 오렌지를 집어 들었다. 두꺼운 껍질에 칼집을 내어 벗겼다. 터진 과육에서 상큼한 냄새가 났다. 케이티가 틀어놓은 씨디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오래된 노래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니, 어쩌면 딜런의 차에서 들어봤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음악 취향이 엄마의 유산이라고 자주 말하곤 했었다. 케이티가 전주를 흥얼거리며 팬케이크를 뒤집었다.

 “, 산부인과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버터와 메이플 시럽을 잔뜩 올린 팬케이크를 칼로 잘랐다. 손이 떨려 겹겹이 쌓인 팬케이크가 흐트러졌다. 나는 다시 신중하게 그것들을 쌓아 올렸다. 케이티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눈썹을 치켜떴다.

 “?”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어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쉬는 날,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면 나는 케이티의 집에 갔다. 딜런이 나와 만나기 시작하고서도 2년가량을 더 살던 집이었다. 본다이 정션에서 시작되어 왓슨스 베이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도로 한편에 위치한 이 집은 우리 집에서 딱 20분이 걸렸다. 언덕이라 요즘 같은 여름에는 땀을 줄줄 흘리며 와야 했다.

 케이티는 내게 아침을 해주었고,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었다. 같이 영화를 보거나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오후엔 마트에 가 쇼핑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가끔은 딜런이 그녀의 집으로 와 같이 저녁을 먹고 가기도 했다.

 “내가 아는 병원을 문자로 보내놓을게.”

 “감사합니다.”

 케이티는 내가 까 놓은 오렌지를 한 입 먹었다. 오렌지가 맛있네,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애써 웃었다. 그녀의 찻잔이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내가 80불이 넘는 돈을 주고 샀던, 찻주전자와 세트인 잔이었다. 그녀를 처음 보는 날 선물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심코 팔을 뻗어 찻잔을 떨어뜨리기 전에 재빨리 안쪽으로 옮겼다. 케이티가 고마워, 지나가듯 말했다.

 

 

 

*

 

 

 

 분갈이를 했다. 와라타라고 불리는 호주의 흔한 꽃인데, 화분에 키우는 것은 딜런도 처음이라고 했다. 케이티의 집 앞 공동화단에 있는 꽃이었다. 꽃이 피면 직경이 10cm가 넘고 빨강과 분홍, 보라가 뒤섞여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색을 냈다. 발코니에 놓고 키우고는 있었으나 올해는 꽃을 보지 못했다. 내년 봄은 되어야 결과를 알 수 있을 터였다.

 케이티가 추천해준 영양제와 흙을 섞고 원래의 화분보다는 훨씬 큰, 흰색 도자기로 된 화분에 식물을 옮겨 심었다. 검색해본 결과 식물보다 2배는 큰 화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쩌면 올해 꽃을 피우는 데에 실패한 게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딜런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상의를 벗은 그는 주방으로 왔다. 나는 식탁에 랩탑을 두고 앉아 비자 신청을 위한 질문표를 채워 보고 있었다. 내가 등을 가볍게 감싸며 끌어안자 배가 고파, 그가 말했다. 형광색 작업복이 먼지와 알 수 없는 흔적들로 더러워져 있었다. 아마 중장비에서 나온 기름 떼일 것이다.

 “서류 작성하고 있었어. 볼래?”

 “.”

 그가 냉동 피자를 오븐에 넣으며 대답했다. 나는 와인을 땄다. 너도 마실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 랩탑을 가져간 그는 빠른 속도로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가사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살림을 어떻게 분담하고 있는지 대략 써놓긴 했지만, 문장을 완성하고 다듬는 건 그의 몫이었다. 딜런은 일하는 내내 모자를 쓰고 있던 것인지 머리가 눌려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쓸어 주었다.

 “다음 주에 케이티 생일인 거 알지?”

 “까먹었어.”

 딜런이 날짜를 헤아리더니 대답했다.

생리가 일주일 밀렸다. 나는 생리 주기가 꽤 규칙적인 편이었다. 하루 이틀 늦춰진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길게 소식이 없는 것은 처음이었다. 2주 전에는 생리 마지막 날처럼 하혈하기도 했었다.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임신일 수도 있었다. 늘 콘돔을 사용하긴 했지만 백 퍼센트 안정성이 보장되는 방법은 아니니까. 다른 문제일 수도 있었다. 몇 년 전, 지인이 갑자기 입원해 자궁의 물혹을 뗀 일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궁은 침묵의 장기라며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산부인과에 간 것이 언제였나 생각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마 호주에 오기 전, 그러니까 4년 전쯤에야 갔을 것이다.

 “서류는 준비가 된 거야?”

 딜런이 랩탑을 돌려주며 물었다. 나는 정리된 문장들을 눈으로 읽었다.

 “반쯤. 일단 연금 서류는 팩스로 받아놨어.”

 재정 항목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서류 준비가 특히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비자 신청을 위해서는 연금 상속자를 서로로 등록해놓아야 했다. 등록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와 동시에 공유하게 된 서로의 계좌 내역이었다. 우린 아직 어리고 지금이라도 잘 대비하면 된다고 서로를 다독였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딜런이 20대 중반이 되도록 케이티의 집에 살고 있던 이유가 있었다. 그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유학원에서 출석과 과제를 제대로 해내지 않아 비자가 취소될 위험이 있는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릴 때, 동시에 파트 타임으로 카페에서 일할 때, 그러며 일주일에 800불이 조금 넘는 돈을 벌 때, 딜런은 도로에 나가 공사판에서 일했다. 그의 수입은 불규칙한 편이긴 했으나 언제나 1,000불은 넘었다. 우리가 같이 번 돈 중 700불은 집세로 나갔다. 그리 대단한 집도 아닌데 말이다.

 그 와중에도 나는 아직 학생 비자였기에 주에 한 번은 학교에 가야 했고 의미 없는 과제를 제출해야 했다. 유학원 일은 캐쉬잡이라 시간제한이 없었지만 시급이 낮았고 카페 일은 주 25시간밖에 하지 못했다. 법이 그랬다.

 “아주 어릴 때 말이야.”

 양치를 했지만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딜런이 응, 잠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무 못생겨서 엄마가 항상 모자를 씌워서 다녔대. 엄마는 손재주가 좋아서 뜨개질을 많이 했거든. 모자도 뜨고 옷도 떠 입혀서 밖에 내보냈대. 그래서 어릴 적 사진에는 모자를 쓰고 있는 게 많아.”

 딜런이 어깨를 두른 손에 힘을 주었다. 엄마 얘기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너는 아름다워. 어렸을 때도 그랬을 거야. 그녀가 나쁜 거야.”

 딜런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가르마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어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딜런은 내가 엄마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죄책감이나 미안함은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위안을 느끼기도 무력함을 느끼기도 했다. 영어로 발화되는, 번역과정을 거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은 쉽사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딜런이 이번에는 가르마에 맞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엄마와는 잘 맞지 않았다. 언제나 싸웠다. 다투고 있는 주제는 제쳐두고 서로를 상처입히기 위해서만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엄마가 갱년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더 심해져서 말싸움을 하다가 따귀를 맞는 일도 있었다. 더 심한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나는 엄마를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미개한 사람이라며, 아직도 사람을 때린다며 욕을 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내 행실을 비난했다.

 관계가 좋았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며칠을 채 가지 못했다. 한 번은 삼 개월 넘게 대화를 안 하다가 간신히 화해를 하고 교외에 놀러 나간 적이 있었다. 봄이었고, 둘 다 기분이 좋아 맛있는 것을 먹고 통일전망대 같은 것을 본 후 돌아오자 한 것이었다. 파주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싸웠다. 엄마는 자유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게 내리라고 했다. 차는 속도를 높여 빠르게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말도 없이 친구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엄마는 집에 돌아온 나를 잠시 외출했다 온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게 다였다.

 술기운이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 이불은 그와 나의 온기로 따뜻했다. 딜런이 뒤척였다. 최대한 내게 가까이 붙은 채, 그는 내 반대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따뜻한 등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안았다. 나는 아무 때나 돌아누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내 쪽 침대 끝에, 딜런에게서 등을 보이고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딜런은 그런 적이 없었다. 딜런이 숨을 내뱉으며 옆구리 위에 얹어진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우리의 몸이 하나처럼 완벽하게 붙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한인 친구들과 연락하지 않았다. 여러 일을 전전하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모임이라고 할 만큼 거창한 그룹은 아니었지만 주에 한 번쯤은 만났다. 우리는 공통되게 한국을 싫어했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내가 딜런과 파트너 비자를 신청할 생각이라고 했을 때, 일식집에서 일하며 만난, 이미 호주에서 8년을 산 언니는 부럽다고 말했다. 자기도 젊었을 때 남자 하나 꼬셔서 어떻게 해볼 걸 그랬다고. 우리는 웃었다. 나 역시도 자주 했던 말이었다. 딜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확 저질러버려? 술에 취해 장난식으로 떠들곤 했었다.

 그 후로도 나는 그들을 자주 만났다. 일의 고단함을 토로했고 이민성의 비자 정책을 비난했으며 환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일식집을 그만두었고 지금의 유학원에 취직했다. 일을 하면서 나는 내내 구직 사이트에 돌아다녔다. 여기서 도대체 무얼 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지, 2년제 전문대를 졸업하고 생리가 끊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며 일했던 사무직 경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나는 몰랐다. 친구 중 몇 명이 한국으로 돌아가며 인원이 줄었다. 남은 사람들은 나와 시간이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이제 케이티만을 만났다. 내 일주일은 딜런과 케이티로 채워졌다.

 눈을 감기 전 나는 케이티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링크를 누르니 병원 사이트로 연결되었다. 들어가자마자 나온 것은 엎드려 누워 있는 갓난아기였다. 바로 아래에는 의사 사진과 소개가 있었다.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초음파 전문의라는 것과 고위험 임신에 큰 관심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단어들을 일일이 사전에 검색했다. 산부인과 의사, 부인과 전문의, 초음파 전문가. obstetrician. 나는 여러 번 소리 없이 그 단어를 입에 굴렸다.

 

 

 

*

 

 

 

 랩탑 바탕화면엔 사진 파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나는 사진을 쓸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했다. 비자 신청 서식 3번 항목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서로의 주변인과 자주 교류하고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사진들은 어딘가 애매해 보였다. 웬만해선 내가 직접적으로 딜런의 가족과 맞닿아 있거나 대화하고 있는 사진을 찾고 싶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진에 나는 피사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직접 찍었기 때문이었다. 종종 다른 사람이 찍어준 것도 있었으나 어색하게 웃고 있는 단체 사진이나 피로한 얼굴로 앉아 케이티와 대화하고 있는 사진뿐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증언해줄 사람으로는 케이티와 딜런의 아빠, 딜런의 친구를 골랐다. 케이티는 단체 사진에 자주 나오니 괜찮았고 딜런의 친구는 파티를 하다 찍은 사진이 있으니 해결되었다. 문제는 딜런의 아빠였다. 빠른 시일 내에 그를 다시 방문해 사진을 찍어야 했다.

 기껏 서류에 넣기로 확정한 것은 딜런의 누나와 함께 떠난 휴가, 각자의 생일파티, 크리스마스, 그리고 단체 사진 정도였다. 한 해의 대소사를 함께한 것이니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았으나 조금 더 완벽한 사진을 찾고 싶었다. 사진 속에서 나는 누구와도 친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이사하며 찍은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딜런의 친구들과 지금은 멀어진 한인 친구들이 와 가구를 조립하고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친구가 찍어준 사진 속에서 나는 한 손에 맥주병을 들고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서 있었다. 팔을 뻗고 있었는데 다가오는 딜런을 안으려고 했던 것처럼 보였다. 옆에는 막 완성한 서랍장이 있었고, 친구들은 똑같이 맥주병을 들고 서서 내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완벽하게 평화로워 보였고, 내가 그 상황에 동화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서류에 넣기 적합한 사진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일 년 전이었다. 딜런과 나 둘 다 제대로 된 집을 갖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줄곧 엄마와 함께 살았다. 이미 유행이 지난, 사용감이 적나라한 가구들 때문에 집은 엉망진창으로 못생겼었다. 호주에 온 뒤로는 셰어하우스를 전전했다. 3인실에서 시작해 2인실로, 끝내는 독방으로 옮겨왔으나 나는 방을 꾸미는 데에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 남짓을 살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공동주택의 3층에 위치한 이 집은 케이티의 집처럼 주방에 거대한 창이 있었다. 거실과 이어지는 발코니는 꽤 넓어서 잘 활용한다면 바비큐를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화장실이 딸린 마스터 룸과 작은 방 두 개가 더 있었는데, 셋 다 크기가 고만고만했다. 킹사이즈 침대를 들이겠다는 우리의 야망은 퀸사이즈로, 마침내에는 더블베드로까지 축소되었다.

 우리는 매트리스와 그에 맞는 프레임을 샀다. 4인용 식탁을 사고 작은 소파와 책장을 샀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쇼룸엔 가구가 가득 차 있었으나 하나도 번잡해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조립한 가구는 쇼룸에서 보던 것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것은 너무 커 보였고 어느 것은 차가워 보였다. 나는 딜런이 페인트칠한 벽 위에 사진과 포스터를 잔뜩 걸어놓았다. 우리는 모든 작업을 아주 신중하게 했다. 평생을 거기서 살 것처럼.

 딜런은 아기 침대나 장난감 수납함을 보면 사족을 못 썼다. 한 번은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방 하나를 비워놓자고 의미심장하게 말해서 그건 한참 지난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한 것 아니었냐고 내가 상기시켜줘야 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때 아직 연인 사이에 불과했었다.

 새집에 들어와 살며 아이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있으면 비자 문제가 쉽게 해결되었다. 파트너 비자로 영주권을 얻는 방법은 예상보다 복잡했다. 일단 서류를 준비해 신청하면 심사 끝에 임시 비자가 나왔다. 그게 영주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진짜 영주권 심사가 시작되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였다. 아이가 있으면 임시 비자 후에 바로 영주권 승인이 가능했다.

 2년간 우리의 관계가 멀쩡하리라는 보장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미 정이 다 떨어졌지만 영주권을 위해 파트너 옆에 머무는 사람들의 글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었다. 딜런과 내가 만난 것은 고작 3년 정도였다. 지금 와서 다른 방법으로 영주권을 딸 궁리를 해본다고 해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취업 이민을 고민하는 사람과는 경쟁할 수 없을 게 뻔했다.

 

 

 

*

 

 

 

 아래에서 무언가가 울컥 나왔다. 케이티는 바닷가의 샤워기에서 서핑보드에 묻은 모래를 씻어 내리고 있었다. 그녀 몰래 허벅지 안쪽을 확인했다. 피가 배어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몸에 들어갔던 바닷물이 조금 따뜻해진 채로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아직도 생리는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케이티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더니 내게 물을 건넸다. 미지근한 물에선 희미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우리는 서핑보드를 옆구리에 낀 채 카페로 향했다. 그녀는 나보다 자세가 꼿꼿했다.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뻗어 나와 있었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살 위로 드러났다. 내 나이의 두 배는 되는 사람인데 말이다. 케이티의 가장 오래된 취미는 서핑이었다. 나는 여가시간이 생길 때마다 케이티의 여정에 합류했다. 이제 슬슬 파도를 타고, 짧게 일어설 수는 있지만 어느 파도가 내 파도인지, 물을 심하게 먹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각자 음식을 시켰다.

 “너는 서핑에 재능이 없어. 미안하지만 이건 알아야 해.”

 알아요, 말하며 웃었다. 나는 서핑을 끔찍할 정도로 못했다. 서핑을 배우고 싶던 적도 열정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저 케이티가 서핑을 좋아하기에 따라 나와 같이하는 것에 불과했다. 여기 오지 않았다면 집에서 이력서를 쓰고 고치는 걸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고쳐봤자 단어만 다를 뿐 실질적인 내 이력은 똑같은데 말이다.

 그녀와 물에 들어간 첫날엔 파도에 휩쓸렸다가 케이티에게서 구조됐다. 그 후로도 나는 종종 물을 심하게 먹거나 어지러움에 해변으로 나가 오랫동안 쉬어야 했었다. 케이티는 내가 그러든 말든 꿋꿋이 서핑을 했다. 하지만 위험한 순간이 오면 언제나 나를 구해주었다. 주기적으로 몸을 쓰며 살이 빠지고 몸에 근육이 붙기는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오직 나만이 아는 사소한 변화였다.

 “병원에는 가 봤니?”

 “아니요.”

 “그래.”

 케이티는 잠시 말이 없다가 넌 괜찮을 거야, 덧붙였다. 임신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 중 어느 쪽이 괜찮은 것일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커피 대신 시킨 주스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수영복에서 나온 물기로 반바지 엉덩이 부분이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비자 신청 폼을 거의 다 완성했어요. 혹시 한번 봐주실래요?”

 “할 수야 있지. 그래도 법무사를 쓰는 게 나을 텐데.”

 “일단은 한 번 해보려구요.”

 파트너 비자를 신청하는 데에는 7,000불이 넘는 돈이 들었다. 우리는 저금통장을 쪼개고 쪼개 간신히 여유 자금을 만들어 놓았다. 법무사를 고용했으면 거기에 3,000불가량이 추가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돈 때문에 몇백 불 남짓의 상담비를 내고서도 법무사 쓰는 것을 포기했다. 집 보증금에 매달 월세를 내고 비자 신청비를 모으는 것만 해도 빠듯했다.

 “제임스는 어떻게 지내든?”

 “잘 계세요. 휴가로 뉴질랜드에 갈 계획이래요.”

 케이티는 눈썹을 한 번 치켜 뜨더니 말 없이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어제는 제임스와 저녁 식사를 했다. 케이티와 제임스는 딜런이 열 살일 때 이혼했다. 제임스는 몇 년이 지나 새 가정을 꾸렸다. 전에도 몇 번 그를 본 적이 있으나 어제는 목적이 있었다. 화목해 보이는 사진을 찍어야 했다.

 제임스는 비밀이라도 되는 것마냥 사춘기 때의 딜런이 어땠는지 말해 주었다. 케이티와 잔뜩 싸우고는 자신의 집에 와 잠만 자고 나가는 날이 많았다고. 학교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 자신에게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고. 딜런은 꼭 사고를 칠 때만 자기를 찾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제임스는 웃고 있을 뿐 섭섭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케이티와 마찬가지로 제임스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의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듯 자주 입을 맞추거나 손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딜런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제임스의 아내가 우리 사진을 찍어 주었다. 소박하게 차려진 테이블 앞에 딜런과 내가 나란히 앉아 있었고 제임스는 우리의 맞은편에 있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축하한다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해 주었다.

 나는 케이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짚어낼 수는 없지만 딜런을 닮은 윤곽을 말이다. 나는 케이티와 제임스는 왜 이혼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와 현재 아내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딜런은 내게 그런 정보는 잘 알려주지 않았다.

 케이티는 남자친구가 없었으나 여자친구들은 많았다. 일하다 만났거나 같이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속에서 케이티는 미혼의,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여자처럼 보였다. 나는 케이티가 딜런을 소리 높여 부르며 집안일을 시킬 때마다 그녀가 딜런을 낳았었지, 둘은 25년을 함께 살았지, 상기하곤 했다.

 둘은 자주 부딪히지 않았다. 하지만 딜런이 여전히 마약을 하는 것을, 종종 위험할 정도로 그러는 것을 케이티는 이해하지 못했다. 케이티와 나는 딜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쉽게 눈에 보였다. 그를 암시하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케이티는 입을 다물거나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녀는 그저 참고 있었다. 딜런이 성인이 된 후로 그녀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딜런은 그 때문에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케이티 혹은 제임스의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나온 날이면 딜런은 내게 말했다. 내게는 너밖에 없어.

 

 

 

*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케이티의 집에 나와 딜런, 그의 누나가 모였다. 저녁으로 바비큐 파티를 하고 와인을 잔뜩 마셨다. 딜런은 은근히 친구와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는데 나를 버리고 가기는 좀 그런지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옥상 테이블을 정리하고는 집으로 내려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주 내가 이해하지 못할 맥락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만이 알고 있는 농담인 것 같았다.

 케이티가 틀어놓은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돌아가며 춤을 췄다. 미열이 있었고, 술을 마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는데도 나는 먼저 자러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귀에 익기는 했으나 가사도 이어질 리듬도 모르는 노래였다. 나는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그들이 가끔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는 것을, 연말을 즐기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금 두려워졌다. 이들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더 만들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 때문이었다.

 이들에게는 존중과 애정이 있었다. 내게는 애증이 있었다. 증오 없는 가족 관계를 정말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해보곤 했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끈끈해 보였다. 동시에 모든 게 연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 순간에, 담배 냄새가 밴 지하 노래방에서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 트리 옆에서 그러고 있을 때 말이다. 사소한 실패에 난 너를 믿어, 너는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야, 라고 다정하게 말할 때 말이다. 그 풍경엔 대부분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몇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 이들의 모습은 옛 티브이 광고에 나오는 가족 같았다. 빛바랜 색감에 배경음악으로는 경쾌한 재즈가 흘러나오는.

 호주에서 4년이 넘게 살았지만 아직 내게 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어색했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자 한인 친구가 올린, 포차에서 닭발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사진이 가장 먼저 보였다. 한때 내가 친했던 몇 명과 새로운 사람들 몇 명이 한인 타운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발랄하게 쓰여진 코멘트를 읽고는 좋아요를 눌렀다. 호주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을 위한 명절이었다. 어느 것이 더 즐거운 것일지 나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밤이 되어서야 케이티의 집에서 나왔다. 열이 남아 있어 어지러웠다. 딜런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걸었다. 공기가 습했다. 그는 내일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럴지도 모르겠네, 대답했다.

 “영주권이 나오면 나를 버릴 거야?”

 우리가 집을 얻은 지 삼 개월 남짓이 지났을 시점이었다. 내 비자 연장 방법을 같이 고민하다 딜런은 나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가능하다면 함께 늙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법무사에 연락하지 않았고 그저 생각만 하고 있던 때였는데도, 딜런은 그렇게 물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채로.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딜런은 신호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그를 조금 더 내 옆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얇은 반팔티가 땀에 젖어 있었다. 문득 그의 어깨 위에 풀벌레 한 마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더듬이가 길고 몸통은 풍뎅이처럼 생긴, 낯선 벌레였다. 몸이 가로등 빛을 받아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번쩍였다. 나는 그의 얼굴과 벌레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모르겠어. 너는 가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나를 떠나갈 것 같아.”

 그의 말이 연결 상태가 좋지 않은 스피커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신호가 바뀌었다. 딜런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벌레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움직였다면 그게 어디로 갔는지 따라가기 위해서. 딜런이 재촉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속삭였다.

 “널 버리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딜런이 정말? 물었다. 정말. 나는 대답했다. 딜런이 걸음을 옮기자 풍뎅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나는 그제야 딜런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명절이 싫어.”

 딜런이 말했다. 나는 가족 속에서 이따금씩 가라앉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다, 나도 그래, 대답했다.

 

 

 

*

 

 

 

 알람 때문에 눈을 떴을 때 딜런은 샤워를 하고 있었다. 물을 끓였다. 핫초콜릿이 마시고 싶었다.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이었다. 케이티의 집을 거쳐 우리 집까지 왔을 차들이 왓슨스 베이를 향해 달려 나갔다.

 딜런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어딘지 피로하고 어딘지 개운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잠 잘 잤냐고.

 “5시간쯤 잤어. 아직도 자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은 어때?”

 “이따 할 말이 있어.”

 나는 딜런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는 약에 취해 있었다. 눈이 풀려 있었고, 졸음을 숨기지 못하는 게 티가 났다. 친구의 집에서 자고 올 것이고, 아무래도 약을 좀 할 것 같다고 하긴 했었다. 자꾸 얼굴 근육이 풀린 사람처럼 웃길래 나는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난 네 파트너니까 이런 말 해도 되지? 네가 자꾸 마약하는 거 싫어. 예전보다 훨씬 덜 하는 거 알아. 근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최소한 집에 돌아올 때는 맨정신이어야지.”

 딜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딜런은 이랬다. 딱히 실망한 적도 없었다. 그는 심한 중독자가 아니었으며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여기선 꽤 흔한 일이었다. 나 역시도 종종 파티에서 약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혹시 모르니까. 나는 다리를 조금 움직여 주머니 속에 테스트기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안 할게.”

 “?”

 “안 할 거야. 진짜로.”

 “거짓말.”

 “네가 싫다면 안 할 거야. 기다리고 있었어, 그 말.”

 딜런의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가 목에 둘러놨던 수건을 풀어 머리를 털어 주었다. 딜런은 얌전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리곤 귓가에 대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종일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보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딜런 몰래 작게 웃었다.

 딜런은 본다이 비치 바로 아래에 있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열 살에 케이티와 같이 본다이로 이사를 하고서는 줄곧 같은 곳에서, 나와 살림을 합치지 전까지 살았다. 동시에 그는 제임스 집과 친구 집을 떠돌기도 했다. 네가 엄마를 택한 거야? 이복동생들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어? 악의 없이 나는 묻곤 했었다. 딜런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엄마를 택한 것도 있지만 양육권 싸움에서 엄마가 이긴 게 컸다고, 이복동생들은 그냥 가까운 친척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는 딜런이 케이티의 집에서 뛰쳐 나가 하루종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친 몸으로 제임스의 집에 가는 걸 상상했다. 넘어질 것처럼 자주 휘청거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는 다리를. 가라앉은 숨을, 나른해져 어디에든 기대고 싶어 하는 몸을.

 자꾸 몸을 치대려고 하길래 나는 그를 아프다 싶을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딜런은 키가 커서 그가 나를 안는 것처럼 할 순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딜런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할 말, 일에 갔다 오면 말해줄게, 그에게 말했다. 딜런은 물을 한 잔 마시고 침실로 들어갔다.

 핫초콜릿 분말을 잔뜩 넣은 컵에 물을 붓고 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나는 딜런이 들어간 우리의 침실과 서재, 창고, 화장실로 나누어진 복도를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수납되어 서랍에 들어가 있는 식재료와 작은 조명, 발코니에 놓인 식물을, 오랫동안 천천히 보았다. 버거울 정도로 돈을 쓰며, 서로의 시간과 노동력을 희생하며 만들어낸 안락한 집을 말이다. 그리고 잠시 서울의 집을 떠올렸다. 서울 끝자락에 위치한 단독주택을. 언젠가는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며 샀을 낡은 가구들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울할 때, 응원이 필요할 때, 나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그런 것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집은 이곳이었다. 이곳, 본다이였다.

 욕실은 수증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창문을 한 뼘이 채 못 되게 열었다. 소변을 보았다. 플라스틱 컵에 소변을 받고 테스트기 끝을 담갔다.

 파트너 비자를 준비하며 나는 때때로 딜런과 내 아이를 상상했다. 우리의 유전자가 합해져서 태어난 아이는 어떻게 생겼을까. 나를 닮았을까 딜런을 더 많이 닮았을까. 딜런은 머리가 어두운 편이니까 머리칼은 검은색일 것이다. 눈동자도 고동색이겠지. 눈은 어떨까. 쌍꺼풀이 있을까. 눈썹이 진할까. 그런 건 딜런을 닮았으면 좋겠다. 나는 머리숱이 적어서 꾸준히 영양제를 챙겨먹는데, 딜런의 머리는 우스울 정도로 빽빽했다. 코는 어떨까. 그것도 딜런을 닮았으면 좋겠다. 입술도. 그를 똑 닮은 어린아이는 귀여울 것이다. 그 아이가 우리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나는 것을 보는 건, 정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축복 같은 것이겠지.

 그러나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아이를 키울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딜런은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 아마 나는 꾸짖는 쪽이고 딜런은 달래는 쪽이 될 것이다. 딜런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운동을 할 것이고, 아이와 비디오 게임을 할 것이다. 내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거나 아이의 책가방을 챙기는 일 외에는,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아이는 딜런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너무 무섭다면서. 부디 내가 아이를 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에게 호통을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5분이 지났다. 테스트기는 깔끔한 한 줄을 그리고 있었다.

 딜런은 할 말이 뭐였냐고 내가 퇴근하자마자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딜런은 며칠을 꾸준히 캐묻다가 포기했다.

 

 

 

*

 

 

 

 쿠키가 구워지고 있었다. 케이티의 생일이라 딜런과 내가 케이크를 구울까 했는데 그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자기 집에서 다 같이 쿠키나 굽자고. 주방을 정리하고 곧장 우리는 소파에 널브러졌다. 족히 20분은 구워야 하니 시간이 붕 뜨는 셈이었다.

 쿠키를 반죽하는 동안 딜런은 차고에서 케이티가 부탁한 잡일을 했다. 나는 쿠키 반죽을 조금 떼어 입에 넣으면서 병원엔 아직 가지 않았지만 임신은 아니라고 말했다. 케이티는 내 티셔츠 앞섶에 묻은 밀가루를 손으로 털어 주었다. 그녀는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이가 갖고 싶니? 물어봤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공구 상자를 들고 돌아온 딜런에게 웃어주며 대답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비가 꽤 들어와 소파 등받이는 이미 축축해져 있었다. 이마 위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좋은 생각이 있어.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지? 게임을 하자.”

 케이티가 말한 게임은 간단했다. 돌아가면서 빛났던 기억과 슬펐던 기억 하나씩을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눈을 감고 이야기를 하고 들어야 했다. 딜런은 익숙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곤 내 귀에 속삭였다. 뭔가 캐내고 싶을 때마다 이걸 하자고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수상해 보였나 봐.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아침 우리는 7,160불을 결제하고 왔다. 서류 작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민성에서 자동으로 접수되었다는 메일이 오기는 했다.

 비가 내려 젖은 땅을 차 바퀴가 쓸고 가는 소리, 오븐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노후한 벽 속 파이프를 타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딜런이 말을 시작했다. 나는 허벅지에 얹어진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살짝 포갰다.

 “이사가 마무리되는 날이었어. 한참 마지막 가구를 조립하고 있는데 소라가 사라진 거야. 거의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보이지 않더라고. 나사를 조립하던 걸 내팽개치고 밖으로 나갔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데 소라가 없더라고. 마치…… 겨우 아장아장 걷는 세 살짜리 아이를 잃어버린 기분이었어. 집 앞에 서서 손톱을 뜯고 있는데 저 멀리서,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소라가 걸어오는 게 보였어. 품에 거대한 화분을 안고 있었는데 몇 걸음 걷다 멈춰 서고 다시 걸으면서 오고 있더라고. 그냥 이걸 집에 들여놓고 싶었다고 소라는 말했어. 땀을 닦으면서. 우리가 한집에 살게 된 것을 축하하고 싶었다고.”

 공기가 버터 녹는 냄새로 뭉근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딜런에게 기대 누워 그의 슬픈 기억을 마저 들었다. 말이 끝나자 딜런이 내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집을 합치며 그의 냄새는 점점 희미해지더니 우리 집 냄새와 뒤섞여 잘 맡을 수 없는, 너무나 익숙한 냄새가 되어버렸다.

 사실 그날 내가 사려고 했던 것은 행운목이었다. 딜런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다. 식물 상점에 찾아가 행운목을 번역해 보여주니 직원이 웬 거대하고 잎이 많은, 그야말로 나무 같은 어떤 식물을 보여 주었다. 나는 다시 검색해 내가 흔히 보아온 작은 나무토막을 보여 주었다. 그게 크면 이렇게 돼. 직원은 말하며 웃었다. 못생긴, 축 늘어진 잎을 바라보다가 나는 잠시 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7년에 한 번, 그것도 불규칙한 주기로 꽃을 피워낸다는 행운목은 그때의 내게 너무 멀어 보였다. 식물들 사이를 걷다가 나는 케이티 집 앞에 있는 꽃을 발견했다. 나는 직원에게 그 꽃의 이름을 물었다. 와라타. 그리고는 꽃이 없는 거로 하나 달라고 했다.

 어쩌면 행운목을 집에 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발코니는 넓으니까.

 나는 오늘 아침에 비자 접수비를 결제한 얘기를 했다. 케이티는 축하한다고, 제대로 된 파티를 다시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녀가 우리 둘의 손을 맞잡고 잘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호박색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심 어린, 신뢰를 담은 눈이었다. 이제 비자 문제는 내 손을 떠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민성은 서류로 우리의 관계를 판단할 것이었다. 공동명의로 된 우리의 계좌와 집, 기념일 사진, 주변인의 증언 같은 것으로 말이다. 나름대로 잘 준비했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케이티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새로운 찻물을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스토브 앞에서, 카운터에 몸을 조금 기댄 채였다. 아득한 시선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잠시 햇빛이 쏟아졌다. 케이티의 새어가는 머리카락이, 얼굴에 핀 검버섯이 빛 아래에서 희미해졌다.

 주전자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케이티가 오븐에서 쿠키를 꺼냈다. 신나서 다가온 내게 그녀는 식혀야 더 단단해진다고, 그래야 맛있다고 말해주었다. 딜런이 케이티의 컬력션에서 씨디를 꺼내 틀었다. 오래 전 딜런이 소개시켜준,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앨범 이름을 읊조리자 케이티가 내가 선물한 잔에 물을 따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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