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세계] 나의 작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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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세계] 나의 작은 세계
  • 이유리 작가
  • 승인 2020.08.17 2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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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은정’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형식의 철학 칼럼입니다. 원 저자는 이준형 작가임을 밝힙니다.

  “이게 뭐야?”

  사표를 받아든 대표가 물었다. 지난 1년 6개월간 나를 가장 끈질기게 괴롭힌 사람이었다. “네가 요즘 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는 건 알겠어. 부득이하게 야근도 많이 한 거 알고 말이야. 그치만 이런 중요한 시점에 네가 나간다고 하면 말이야. 회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 작은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나가더라도 최소한 이, 삼 개월 정도 인수인계할 생각은 했어야지.”

  면담을 빙자한 훈계는 정확히 삼십칠 분 동안 이어졌다. 회의실에 들어간 시간과 나온 시간을 재는 습관이 생긴 건, 이번 회사에 들어온 뒤부터였다. 십오 분 이내를 외치며 늘 한 시간 가까 이 회의를 ‘주재’하는 대표 덕분이었다. 대표와 소위 ‘경영진’이라고 불리는 몇몇 사람들은 온종일 회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의를 위한 회의, 또 그 회의를 위한 회의, 다시 또 회의.

  “네, 네.” 삼십칠 분 내내 영혼 없는 대답을 하며 회의실 밖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의 층수를 세었다. ‘십오, 십육, 십칠. 아 십팔, 어디까지 세었더라.’

  대표는 소위 SKY 출신에 S전자를 다닌 엘리트 출신이었다. 본인 피셜*에 따르면 그는 10년 전 한국에 상륙한 모바일 혁명을 그저 회사에 앉아서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주말마다 개발자와 기획자, 디자이너 등이 한데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팀 빌딩을 하는 해커톤** 대회에 참가하길 수십 차례. 육 개월 만에 팀원을 모두 모아 차린 회사가 이곳 ‘리버스 컴퍼니’라고 했다. 본래 의도는 리버 스(Rebirth)이지만 어느새 대표 빼고는 모두가 리버스(reverse)라고 읽기 시작한.

  “그때는 진짜 힘들었어. 개발자는 개발자대로 각자 본인 콧대 세우지, 디자이너들은 하나 같이 신입 급들이지. 솔직히 내가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니까, 기적.” 대표는 지금은 대부분 떠나고 없는 초기 멤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이렇게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물론, 이제는 그 사람들이 회사를 박차고 나갔을 때 느낀 감정이 지금 내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무언가가 시작되는 것은 끝내기 위해서다.”

 

  오 개월 전쯤, 시발 비용으로 등록한 철학 수업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이 던진 말이었다. 해보고 싶은 것도 있고, 이 회사는 아닌 것도 아는데 매달 정확한 날짜에 꽂히는 월급을 보면 도저히 용기가 안 난다는, 전 세계 오십억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고민을 풀어 놓은 직후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의 소설에 담긴 구절이에요. 좀 더 멋져 보이려면 그 뒷부분도 이야기해야 하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 모험적 순간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하하.”

  선생님은 지금의 내가 무언가를 끝내고 다시 시작할지, 아니면 그대로 머물러 있을지 기로에 선 상태라고 말했다. “흔히 익숙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을 안전지대(TCZ, The Comfort Zone)라고 불러요. 손에 익은 업무나 오래된 친구처럼 나한테 안정감을 주는 것이라면 모두 여기에 속하죠. 은정 씨에게 회사 생활은 이런 안정지대 같은 거예요. 문제가 있다면 은정씨가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건 그 밖에 있다는 거고요.

  안전지대를 깨기 위해선 결국 스스로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이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 처럼 말이에요. 소크라테스는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했다고 해요. ‘정말 다 알고 있는 거야? 그건 네가 그 사고의 틀 안에서 안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고 말이죠. 의도적인 불편을 야기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틀을 깨고,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어쩌면 은정 씨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이미 절반은 한 거예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급할 건 없으니까, 조금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는 연습을 해보는 거예요. 헬스장에서 자신의 약한 근육 위주로 단련하는 것처럼 말이죠.”

  앞으로 내가 할 이야기는 나의 직장생활기이자 퇴사연습기이며, 철학을 실천한 기록이기도 하다. 오늘 나의 노크, 그리고 대표와의 (의미 없는) 면담이 앞으로 나에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망설임 없이 마지막 잔을 들이킨 소크라테스처럼 말이다.

 

*공식입장을 뜻하는 오피셜(official)을 줄여 쓴 신조어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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