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신문이 1100호를 맞이했다. 1954년 창간 이후 명지대 구성원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 주었고 헌법상 알 권리에 터 잡아 대학 안팎의 민주화와 집단지성을 도모하였다. 언론의 역할을 떠올릴 때,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1837년 작 ‘벌거벗은 임금님’이 거론된다. 안데르센은 이 우화를 통해 사기꾼 재단사의 탐욕, 임금님의 허영,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잘 드러냈다. 재단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급 실을 잣는다면서 그 실은 “영 쓸모없는 멍청한 자나 자신의 벼슬자리가 아닌 일을 맡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기극에 처음에는 신하들이, 다음에는 임금님이, 그리고 행차를 보는 백성들이 다 넘어갔다. 외려 새 옷(을볼 줄 아는 자신)과 임금님을 소리높여 칭송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꼬마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치자 처음엔 백성들이 다음에는 신하들이 웃었지만, 임금님은 체통을 생각해 행차를 꾹 이어갔다. 이 우화는 민주주의와 집단지성에 심각한 물음표를 던지며 여러 학문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흔히 민주주의를 오해하여 다수의 의견, 이른바 여론을 절대시하는데, 여론은 언론과 다르다. 왜냐면 여론은 인간의 감정에 따라 또 탐욕, 허영, 위선에 따라 변하고 쏠리기 때문이다. 중우정치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 우화는 거짓이지만 다수가 그렇게 믿으면 진실이 되는 심리, 즉 ‘다원적 무지’를 보여준다. 또한, 신하나 백성 중에는 꼬마처럼 외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자신의 입장이 다수의견과 동일하면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발언하지만 소수의견일 경우에는 남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고립되는 것이 두려워 목소리를 소라 모양처럼 스스로 줄이는 ‘침묵의 나선’ 이론도 보여준다. 침묵의 나선은 히틀러를 합법적인 지도자로 뽑고 맹종한 역사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오늘날에도 역사는 반복된다.
요컨대 언론은 여론이 아니다. 또한, 대중이 항상 옳지는 않은데, 민주주의는 전제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투명성, 겸손, 숙의 등이다. 언론은 꼬마처럼 깨어있는 계몽된 시민들의 외침이다. 진실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진실 그대로 알리는 것에서 잘못을 잘못이라고 고백하면서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탐욕, 허영, 위선으로 뒤덮인 중우정치, 무지, 침묵의 행차 대신 숙의민주주의, 지혜, 소통하는 밝고 슬기로운 세상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