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신문을 이끌었던 선배들에게 명대신문의 과거와 미래를 묻다 〈11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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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신문을 이끌었던 선배들에게 명대신문의 과거와 미래를 묻다 〈1100호〉
  • 한혜성 기자
  • 승인 2022.04.11 0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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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신문은 1954년 11월 창간호를 발간한 이후 ‘정론직필’의 좌우명을 갖고서 68년이라는 세월 동안 학우들에게 교내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이어왔다. 그동안 명대신문을 거쳐간 수백 명의 기자들이 밤새우며 수천 개의 기사를 작성해왔기에, 2022년 4월 11월 1100호를 발간하기까지 명대신문이 존속할 수 있었다. 이에 본지는 명대신문사를 이끌어갔던 선배들을 만나 그들은 어떤 상황과 마음가짐 속에서 신문을 발간해 왔는지, 그리고 더 나은 명대신문이 되기 위해선 어떤 발전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신정권 시절 ‘정론직필’을 몸소 실천했던 기자, 명대신문 17기 유승철

명대신문 17기 유승철
명대신문 17기 유승철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명대신문 17기. 무역학과(현 국제통상학과) 77학번 유승철입니다.

Q. 명대신문사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셨나요?

A. 1학년 2학기 때인 9월초, 교문에 들어서면서 게시판에 걸린 명대신문 수습기자 모집 공고를 본 후 과 동기 10여 명과 함께 지원했습니다. 당시 17기 총 지원자는 60여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형은 논설과 면접이었습니다. 출제 제목은 ‘대학 신문의 사명’이었고, 나는 “대학신문이 대학의 기관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수와 학생, 교직원이 학교 발전을 위해 서로 교류하는 소통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라는 의견을 적었습니다. 면접을 담당하신 교수님이 나의 논설에 대해 “고교를 갓 졸업한 1학년 학생으로서 매우 잘 썼다”라는 칭찬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Q. 당시 쓰셨던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어떤 주제였나요?

A. 취재부장 시절인 1978년 가을 청주의 모 사립대학의 재단비리가 학내분규로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명대신문에 〈금전에 의한 지배〉라는 소 칼럼을 작성했습니다. 로마시대에 정치를 타락시킨 금권정치를 빗대어, 대학마저 소수 자본계급이 금전의 힘으로 대학행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비판했는데, 이것이 조선조 연산군 시대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으로 인식돼 70~80년대 명대신문의 대표적인 필화사건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내에 신문이 배포된 후 명지재단 이사장의 비서 실장을 겸임하셨던 교수님으로부터 노골적인 명지재단 비판이라는 강력 항의를 받았고, 주필 교수님으로부터는 무기한 취재보도 및 신문 제작 참여금지 통보를 받았으며, 학과장 교수님은 당장 명대신문 기자직 사표를 내라는 압박을 주셨습니다.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자유가 탄압받던 유신정권 시절 당시에는 충분히 가능한 행위들이었고, 나는 결국 신문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조의제문: 초나라 항우가 의제를 죽인 것에 빗대어, 세조의 단종 폐위 및 왕위 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글. (당시 조의제문처럼, 청주의 모 사립대학의 재단비리에 빗대어 명지재단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인식됨.)

Q. 신문사 활동이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시나요?

A. 시련의 시간도 있었고, 기자로서의 자질을 키울 수 있었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수습기자 전형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주셨던 주필 교수님, 학업을 지도해주셨던 학과장 교수님 모두 내가 ‘재단을 비판했다’는 죄명으로 신문사를 떠나는 데 일조하셨다는 섭섭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1979년 10.26사건 이후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시절에 재단비리를 이유로 학내 분규가 일어났는데, 그때는 내가 배후조종자로 오인돼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에 올라 학교 밖에서 좀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인지와 사유, 도전과 응전의 틀에서 경험했던 명대신문 기자 활동은 졸업 후 공공기관 연구원과 전문위원, 언론사 기자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자평합니다.

Q.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내가 지금 어디로, 어디쯤 가고 있는지 인생의 좌표를 정확히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최소한 1주일 에 한 번 쯤은..

 

 

기사를 넘어 삶의 가치를 기획하는 기자, 명대신문 21기 남경호

명대신문 21기 남경호
명대신문 21기 남경호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명대신문 21기 만화 만평 및 취재 기자로 학우들에게 전공이 ‘명대신문’이라 들을 정도로 대학 시 절을 신문제작으로 보냈습니다.

이후 4학년 때, 제일 기획 공채에 접수해 GD(그래픽디자이너) 직종의 필기-실기-면접 등에서 수석 합격하여 광고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이 회사에서 CW(카피라이터), CD(크리에이티브디렉터), AP(Account Planner)를 지냈습니다. 국무조정실장-경제부총리 정책, 홍보자문을 거쳐 아주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초빙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Q. 당시 신문사 구성원은 몇 명 정도였으며, 신문제 작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됐나요?

A. 정기자-수습기자 등 언제나 15명 내외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작 방향으로는 당시의 억압적, 권위주의적, 군사문화적 시대 문화가 신문사 편집실까지 그대로 들어와 긴장이 매우 높기도 하였습니다. 편집 회의에서의 날카로움은 사실상 여기에 뿌리를 둔 대립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편집 회의를 마치고 제작에 들어가면 완성도 높은 신문을 위해 너나없이 애쓰고 역량을 끌어내곤 했습니다.

Q. 신문사 활동이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시나요?

A. 제 인생을 그대로 관통했습니다. 선후배 동기들과의 신문 제작을 위한 토론과 뒤풀이, 주필 교수와 학교 당국, 나아가 폭압적 권위주의 정부에 닿아 있는 굵은 뿌리들의 확인에 더해, 물리적 제작 경험과 독자들의 반응이 주는 그 영향력의 실패와 성공의 확인 등은 제 피부에 깊이 스며들어 사회 진출과 생활에 잘 맞설 수 있는 근육이 되어 있었습니다.

Q. 최근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발전함에 따라 ‘종이 신문의 위기’라는 말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명대신문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조언이나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A. 종이신문의 위기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상수로 봐야 합니다.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도 이는 여러 수치로 확인되며, 각급 프로젝트와 클라이언트들의 “대체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의 비명 같은 질문이 증거 하고 있죠.

제가 최근 업무에 실험해 보는 한 팁을 공유해 봅니다. “종이는 ‘소장본’처럼, 나머지는 디지털화로 연계” 라는 시도입니다. 이런 대처에 대해 작은 세미나라도 반복해 가져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부디 명대신문이 우리나라 신문의 한글-가로화의 시금석이었듯, 또 한 번 치고 나가는 기회가 되길 바라봅니다.

Q.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두 가지를 기대해 봅니다.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즐거운 자신의 헌신’과 ‘인식적, 행동적 사회 참여’를 견지하시길 바랍니다. 사회에 나오면 그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우리들은 ‘좋은 실패’를 하나씩 새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시대가 바뀌어 점점 더 과거에 배운 능력이 아니라 지금 배우는 능력이 더 빛을 보는 방향으로 갈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희망이 시간만큼 빠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꽤 큰 원인은 기득권의 반성과 개혁 능력이 언제나 기대 이하이기 때문일겁니다. 그래서 ‘사회 참여’를 놓지 말아야 여러분이 뛸 무대를 여러분의 손으로 만들어 뛸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기자, 명대신문 33기 노진선미

명대신문 33기 노진선미
명대신문 33기 노진선미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사회특집부를 거쳐 편집장을 지낸 명대신문 33기 노진선미입니다.

Q. 명대신문사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셨나요?

A. 원래는 화이트호스라고 명대 밴드 보컬에 지원 하고 싶었어요. 그 당시에는 노래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연습실에 몇 차례 갔는데 계속 문이 잠겨있는 거예요. 그러던 중에 사회특집부였던 92학번 같은 과 선배의 소개로 명대신문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지원하게 되었죠. 아무래도 명대신문사에 오게 될 운명이었나봐요.

Q. 당시 쓰셨던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어떤 주제였나요?

A. 수색 철거민촌 사람들의 투쟁과 삶을 24시간 취재하는 르포를 썼던 적이 있어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집을 누군가가 부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날밤을 지내며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사회적 약자에 대해 국가는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Q. 신문사 활동이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시나요?

A. 나에게 신문사는 대학생활의 모든 것이었어요. 따라서 명대신문사는 내 삶의 가장 큰 자부심이며 원동력의 한 부분입니다. 그 나이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20대 청춘의 추억이 강렬하게 기억됩니다.

Q. 최근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발전함에 따라 ‘종이 신문의 위기’라는 말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명대신문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조언이나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A. 신문이라는 매체의 정체성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담아내고 전파시키는 플랫폼이 종이와 더불어 디지털이라는 영역까지 다양화되는 것 입니다. 텔레비전이 대중화되면서 모두들 라디오 시대의 쇠락을 예견했지만 라디오는 보이는 라디오, 팟캐스트 등 뉴플랫폼과 결합하여 새로운 라디오의 모습으로 우리들 옆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명대신문의 주독자는 명지인일 것이며 이들의 생활권 안에 깊숙하고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고 도전하는 것이 명대신문 후배님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Q.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명대신문사를 선택했다는 것부터 우리 후배님들이 훌륭한 청년이라는 반증입니다. 나를 고민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인 거죠. 꿈이 완성될 때보다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들이 더욱 행복합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순간들 속에 서 있는 겁니다. 명대신문사는 대학교와는 또다른 정체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줍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과 맞짱 뜨며 멋지게 사시길 바랍니다!

 

 

과감한 칼럼 연재로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기자, 명대신문 40기 임그린

명대신문 40기 임그린
명대신문 40기 임그린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명대신문 40기 편집국장을 지낸 임그린입니다. 원래는 임지혜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최근 개명을 해서 임그린이 되었습니다. ‘그린대로 세상을 살아가자’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현재 심리상담사와 시사 유튜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Q. 당시 쓰셨던 기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 사가 있다면 어떤 주제였나요?

A. 너무 오래전이라 특정 기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만들었던 칼럼은 기억납니다. 당시 학술 면에 ‘섹스스토리’라는 칼럼을 만들어 연재했었습니다. 그다지 자극적이진 않았던 것 같지만 학교 신문에 처음 실리는 섹스 칼럼이라 그런지 많은 화제가 됐었습니다. 특정 경험담 등을 다룬 건 아니었고, 콘돔에 대한 내용이라거나 지극히 기본적인 성 지식 등을 다뤘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대학내일신문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모 스포츠 신문에 섹스 칼럼을 연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Q. 신문사 활동이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시나요?

A.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 것 같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 일이 왜 일어났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특히 무슨 일이든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시각을 갖추게 됐다고 할까요?

Q. 최근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발전함에 따라 ‘종이 신문의 위기’라는 말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관련하여 명대신문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으신 조언이나 이야기가 있으실까요?

A. 종이 신문의 위기라기보다는 ‘정보 신뢰성’의 위기라고 생각됩니다. 신문과 방송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게 아니라 별도의 팩트체크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유튜브 등 대안 미디어의 등장이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성이라는 말에 기대어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보다는 정확한 팩트와 다양한 시각을 전달하는 심층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Q.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최근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가 꽤 인기를 끌었는데요. 그 드라마처럼 지금 그대로의 나이를 충분히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열심히 사는 것도 좋지만 오늘이 없이는 내일도 없습니다. 오늘 하루하루가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 드라마 속 대사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맨날 진다고 매일이 비극일 순 없잖아. 웃고 나면 잊기 쉬워져. 잊어야 다음이 있어.” 힘든 일, 괴로운 일이 있거든 금방 잊고, 행복한 일을 찾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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