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예수〈Jesus〉의 연대기 〈1100호〉
상태바
[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예수〈Jesus〉의 연대기 〈1100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2.04.11 0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BC6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인 바빌론 밤하늘에 주먹 크기만 한 큰 별 하나가 나타나 초록색 광채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별을 보고 점치는 점성술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별의 색상과 별자리의 위치 등을 분석해 국가의 운명, 통치자, 재해 등을 예단했다. 이 큰 별이 서북쪽을 향해가기 시작했고 점성가들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땅에 세상을 구원할 위대한 왕이 탄생할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 별을 쫓아 1,500㎞를 따라온 3명의 점성술 박사들이 당시 유대의 왕 헤롯의 예루살렘 궁전을 방문해 새로운 왕 그리스도의 탄생소식을 알렸다. 아뿔싸! 본의 아니게 천기를 누설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헤롯은 유대 땅 남쪽 이두매 지역 출신의 이방인이었음으로, 유대의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는 BC20년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충성맹세를 하고 유대의 왕이 되었다. 유대인들 쪽에서 보면 정통성이 없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 또는 외세의 상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헤롯은 항상 누군가가 자기의 왕좌를 노리고 있다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돼있었다. BC6년경부터 BC4년까지 아들인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로, 안티파테르를 반역죄로 처단한 것을 보면 헤롯의 잔인무도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주위의 지경 안에 있는 남자아이들을 2살짜리부터 갓난애까지 몰살시켰다. 이 유아학살을 미리 예견한 성가족(아기예수 · 마리아 · 요셉)은 이집트로 피난해 아기예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고, 2년 후 BC4년 헤롯왕은 죽었다. 이상의 내용을 참고하면 예수는 BC6년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원 원년(AD1년)은 사실 예수가 태어난 지 6년 후 시작된 것이다. 헤롯이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장남 아켈라오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을 중심으로 한 유대 땅을, 차남 안티파스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00㎞ 떨어진 갈릴리바다 서쪽지역, 3남 빌립은 갈릴리바다 동북쪽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이 되었다.

이집트로 피난 갔던 성가족은 BC3년쯤 귀국하여 헤롯의 차남,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분봉 왕국인 갈릴리 바닷가로부터 서쪽으로 20㎞쯤 떨어진 나사렛 마을에서 성장했다. 세월이 흘러 AD6년 아켈라오는 철권정치를 해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로마 황제에 의해 지금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헤롯 왕조의 이름이 차남 안티파스에게로 이양되어 사복음서에서의 헤롯왕이라는 개념이 헷갈려 종종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AD6년 12살이 된 소년예수가 부모를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을 최초로 방문했다. 장차 그리스도로서의 소년시절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5㎞쯤 떨어져 있는 세포리스라는 도시는 헤롯의 둘째 아들 안티파스 분봉왕의 수도였다. 안티파스가 로마 황제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무시하고 화려한 로마식 행각이 늘어선 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에는 노천극장, 원형경기장, 마차경기장 등도 포함됐기에 그리스와 로마의 상인, 건축사를 비롯해 철학, 의학 등 모든 학문의 고수들이 모여들어 헬레니즘 말기의 유대 땅에서는 문화적으로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이었다.

목수였던,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분봉왕 안티파스가 건설하는 세포리스의 건축현장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세포리스의 삶의 현장에서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예수는 헬레니즘 문화기의 여러 학문을 섭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오로지 유대인들만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던 유대교라는 종교를 범세계적 문화와 비교해 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 유대지역은 300년 전부터 이미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스의 뒤를 이어 로마라는 굴지의 대제국이 건국돼 유럽과 근동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음으로 예수는 메시아가 다시 유대에 출현하는 것은 유대인들만의 소망에 불가하다고 판단했다.

예수는 사랑이라는 이념의 새 깃발을 내세워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유대인들 고유의 종교인 유대교를 헬레니즘 문화권의 범세계적 종교로 전환시키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개혁의 지도자는 로마 제국에 맞서는 영적이며 초인적인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발달된 로마의 의술과 심령학적 기술을 익혀서 치료가 불가능한 병자를 완치하거나 바다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기적과 같은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예수의 이러한 행적은 박애주의(Philanthropy)적인 메시아로서 유대인들만의 전통적 종교인 유대교를 개혁하여 범세계적인 종교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 자질이었고 또 존재의 가치였다.

예수는 33세가 되던 AD27년 이른 봄날,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왔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전통적 유대교의 성전이 있었고, 성전의 대제사장들에 의해 이단자로 고발되기 위해 온 것이다. 결국 AD26년 유대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고 금요일 오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기에 못 박혀 죽었다. 그리고 3일 후, 부활하여 골고다를 방문한 막달라 마리아와 어머니 마리아를 재회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