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풍속화첩’과 ‘우끼요에’ 〈1097호(개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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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풍속화첩’과 ‘우끼요에’ 〈1097호(개강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2.02.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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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일제강점기였던 1920~30년대, 그때 초등학교를 다녔던 한국인들은 어쩌다 일본인이 되어 왜(倭)의 건국신화를 배웠다. 최초의 일본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호노니니기(番能邇邇藝)란 사람인데 그가 왕의 증표로 신기(神器)인 곡옥(曲玉), 칠지도(七枝刀), 동경(銅鏡) 보물 3점을 지니고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온 것으로 배웠다. 20세기 초엽에는 아직 극동아시아지역 고고학의 수준이 미미했기에 상기한 보물 3점의 신비한 형상들은 이른바 일본천왕의 신분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현재 고고학적 측면에서 이 신기들을 바라다보면 곡옥은 서라벌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왕들의 금관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흔한 보석이다. 칠지도는 백제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이 검증되었고, 동경은 청동기시대 이후 거울로 사용된 너무나도 흔한 공예품이므로 사실상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애꿎은 물건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렇듯 한반도의 조형예술은 상고시대로부터 일본열도를 압도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18세기의 영 · 정조 시대 조선의 그림 수준 역시 일본보다 앞서 있었다. 이 시대는 공리와 공론으로만 일관되던 성리학이 타파되고 청나라로부터 실사구시의 실학파 이념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실생활에서 작동하기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 풍속화가로 활동했던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등의 회화작품의 주제는 주로 시정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이 나타나 있는 활기찬 모습들이다. 주로 농기구를 생산하는 대장간, 지붕에 기와를 올리는 건축 장면, 시냇가의 여인들의 목욕장면, 시장에서 춤추는 동자, 무당의 굿판, 선비들의 뱃놀이 등 백성들의 생활상이 주로 그려졌다. 이 그림들을 편집하여 화집(畫集)을 만들었는데 이 화집이 이른바 영 · 정조 시대에 유행하던 ‘풍속화첩(風俗畵帖)’이다. 이 시대 화가들의 관심은 산수화보다 풍속화였던 것이다.

조선왕조 말미에 싹트기 시작한 인문주의적 기풍은 1800년 정조 임금이 서거함으로 사실상 요즘말로 ‘여기까지’가 되어버렸다. 이후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910년 한일합방이 될 때까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며 몰락의 길을 자초하였다.

이 시대 유럽 제국들은 증기기관을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하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녔다. 이른바 산업혁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1853년 증기기관에 원거리 명중률이 높은 대포를 장착한 흑선, 즉 페리제독의 미국함대가 나타나 일본열도해안을 누비고 다니며 통상을 제의하였다. 이에 굴복한 일본은 1년 후 ‘미·일 화친조약’을 맺게 되고, 5년 후 1858년 ‘미·일 수호조약’과 프랑스 등 유럽 제국들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활짝 열어 선진 유럽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렇게 세계 무대로 달려 나가 자본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1868년 일본은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서구제국의 문물을 가속화하여 받아들였다. 이즈음 일본에서는 조선 영 · 정조시대의 ‘풍속화첩’을 닮은 ‘우끼요에(부세회浮世繪)’란 그림이 유행했다. 이 그림들은 영 · 정조시대의 서민생활상을 그린 조선의 화첩과 유사하다.

‘우끼요에’에는 당시 에도 시민들의 긍정적 사고가 새로운 화풍으로 나타나 활기 넘치는 시정의 풍경이나 풍속, 이를테면 일본인들의 민속적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또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관능적 그림들이다. ‘우끼요에’풍의 판화는 서민층에 보급되어 크게 유행하였는데 판화이기 때문에 원판(목판)하나로 수천 장을 찍어낼 수 있었음으로 가격도 저렴하여 모든 계층이 애호하는 일본 대중미술로 각광받았다.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에 일본공예품들이 출품된 장소 한쪽에서는 이 ‘우끼요에’가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이 특수한 일본판화 ‘우끼요에’의 원류는 본래 조선 영 · 정조 시대(1725~1800)에 유행했던 풍속화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 그림들이 파리박람회에서 수십만 장이 팔려나가 이른바 ‘자포니즘’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후기인상파 반 고흐가 1887년 파리시절 그린 캔버스유화. 제목 ‘일본 취미 기생’.
▲후기인상파 반 고흐가 1887년 파리시절 그린 캔버스유화. 제목 ‘일본 취미 기생’.

프랑스 인상파 화가로 유럽근대미술의 종지부를 찍은 ‘수련’의 작가 모네(1840~1926)와 비운의 후기인상파 화가인 반 고흐(1853~1890)등도 이 ‘우끼요에’를 보고 매료되어 다수를 구입하여 감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끼요에’를 베끼거나 그들 그림의 배경에 삽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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