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태산에 오른 사람들 〈10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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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의 인문학 이야기] 태산에 오른 사람들 〈1098호〉
  • 권상인 예술학 박사
  • 승인 2022.03.14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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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권상인 예술학 박사 sikuwn@ks.ac.kr

중국 산둥성에 있는 태산은 1,532m 높이로 백두산보다 1,200m 정도 낮다. 예로부터 주봉인 옥황정(玉皇頂)에는 중국 상고시대인 하 · 은 · 주나라의 제왕 72명이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를 봉선이라 부른다. 우리 조선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한 무제도 황제에 오른 BC 10년 4월 태산에 올라 봉선하였다. 한국 대권주자들 가운데도 종종 중국방문 시 태산에 올라가 대통령이 되도록 마음속으로만 봉선하였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한다. 한국도 높은 산이 있는데 하필 왜 중국의 태산이었을까?

중국 춘추시대(BC 770~453)에 이룩된 사서오경 중에 굴지의 경전인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와 수제자 안연의 이야기들은 유가(儒家)사상의 사제지간에 진정한 면모가 적절히 엮여져있어 매력적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을 보면, 어느 날 공자가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하였다. 어쩌면 바보같은 질문이기도 하다.

공자 왈 “너와 안연 가운데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이에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안연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안연은 하나를 선생님께 들으면 열을 깨닫는데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요” 그러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그래 같지 않지 나도 너처럼 그를 따를 수 없더구나!” 논어의 이런 대목을 보면 논어가 왜 사서오경 중 제1권이 되어야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논어 선진편을 보면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가! 나를 버리시는가!”하며 절규하였다고 한다.

동한(東漢)시대(AD 25~219) 회계지역 사람 왕충(王充:27~97?)은 『논형(論衡)』 서허편(書虛篇)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공자가 수제자인 안연과 함께 당시 노나라 땅에 있는 태산 꼭대기까지 올랐다. 공자가 오른손을 펴 이마에 대고 목을 움츠려 동남쪽을 한참 응시한 후, 안연의 오른쪽으로 다가서서 왼손 검지로 방향을 가리키면서 “안연아 저기 저곳에 가물가물하게 오나라의 창문(閶門)이 보이는데 너도 보이느냐?”라고 소리쳤다. 안연은 얼떨결에 “선생님 보입니다”라고 소리쳤지만 실상 안연의 눈에는 멀고-먼 하늘가에 구름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이때 창문이라 함은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특별히 서북쪽으로 만들어놓은 성(城)의 문을 말한다.

공자가 다시 소리쳤다. “그럼 창문 오른쪽에 매어져있는 백마도 보이느냐?” 안연이 대답했다. “선생님 제 눈에는 하얀 말은 보이지 않고 하얀 천 묶음 같은 것이 보입니다!” 계속 동남쪽을 응시하던 안연이 쓰러질 듯 철퍼덕 땅에 주저앉으며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공자는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안연의 눈을 쓰다듬어 주면서 태산을 내려왔다.

이후 안연은 며칠사이에 그 치렁치렁한 흑발머리가 백발로 변해버렸고 이빨이 모두 빠지면서 속전속결로 쇠약해지더니 그만 죽어버렸다. 태산위에서 공자의 말을 들으며 오나라 창문과 창문 곁에 매어있는 백마를 보기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집중하여 정기를 소진한 결과였던 것이다. 안연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필자가 중국지도를 보면서 태산과 오나라 창문까지의 거리를 환산해보았다. 이 거리는 우리나라 부산에서 압록강 하구까지의 800㎞와 맞먹는다. 중국 땅으로 설명하자면 태산에서 지금의 상해까지의 거리가 된다. 인간은 시력으로는 50㎞ 떨어진 성문이나 백마도 관찰할 수가 없다. 하물며 태산에서 800㎞ 떨어져 있는 오나라의 창문 옆에 매어져있는 백마를 보라했으니 안연이 보았다는 하얀 천 묶음으로 보였던 백마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손짓으로 백마를 가리켰던 공자의 말씀도 ‘글쎄요’가 되고 만다.

전국시대 진나라 27대 무왕(BC 310~307)은 힘이 장사였다. 그는 힘 있는 장사들을 좋아하여 그들을 항상 옆에 두었다. 어떤 날 맹열이란 장사인 신하와 무쇠로 된 큰 솟을 들어올리는 시합을 하다가 승리에 집착하여 안간 힘을 쓰다가 온몸의 근육 끝에 힘줄이 끊어져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안연이 오나라 창문과 백마를 보기위해 시력을 총동원하여 초인적으로 집중했다면 마땅히 눈이 멀어야 되는 것이지 왜 애꿎은 머리털과 이빨이 모두 빠져버린 것인가? 이상의 왕충의 고증(考證)은 오늘날의 의학적인 견해와도 일치되므로 감탄하게 된다.

이글은 공자와 안연의 태산에서의 문답을 필자가 보다 설명을 가하여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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