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제72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삼억 팔천의 오렌지 (소설 부문 당선작)〈1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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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제72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삼억 팔천의 오렌지 (소설 부문 당선작)〈1161호〉
  • 신재인 학생(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 승인 2026.11.08 2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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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억 팔천의 오렌지

엄마가 아주머니를 주 사 회 부르던 시기가 있었다. 원래 쓰던 분이 나흘을 다 커버하지 못했기에 새 파출부를 급하게 구해야 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어느 새벽 산보 중 쓰러진 할아버지는 성모병원 특실에서 나를 조선족 간병인 따위에게 맡길 셈이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에는 너희가 두 손으로 직접 나를 돌봐야지, 라는 뜻이었다. 부모님은 긴 논의 끝에 할아버지의 고집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엄마가 일을 그만두고 주 오 회 병원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는데, 이 지극한 효심에 할아버지 명의의 토지들이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내리사랑은 못 이긴다고 두 분이 할아버지께 받은 게, 아니 받아야할 게 좀 많았냐는 말이다. 나는 교복을, 동생은 태권도복을 입고 도란도란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어찌 됐든 엄마와 고모할머니가 닷새 이틀 해서 번갈아 할아버지를 돌보던 시기가 있었다.

고생하던 당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때가 싫지 않았다. 실평수 72평의 아파트가 온전히 우리 것이었으니까. 아주머니는 소파에 누워 있어도 눈치 주지 않았다. 때맞춰 사과며 단감을 챙겨주었고 환타를 아무 때나 꺼내먹을 수 있었다. 원한다면 마음껏 친구를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다만 우리는 그것만은 하지 않았다. 집으로 누군가를 초대해 웃고 떠들지 말자고. 말하자면 책임감, 혹은 괜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약속이었다. 빼어나게 행복할 때마다 나 때문에 할아버지가 잘못될 것 같은 느낌은 언제나 한 발짝 뒤에서 맴돌았다. 동생과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모였다. 우리는 엎드린 채 올레 TV로 아무 영화를 봤다. 식사 때가 되면 냉장고의 반찬들을 보지 못한 척 베이컨 포테이토 피자를 시켜 먹었다. 어차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면서. 너, 진짜 미국 갈 거야? 수호의 답은 그때그때 달랐다. 아마도? 별로.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게 하래. 그럴 때면 나는 디핑소스의 칼로리를 묻는 양 심드렁하게, 특별히 기대하는 바는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내심 그 애가 한국에 남겠다고 해주기를 바랐다. 내가 다섯 살 때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한 작은아빠 부부는 일년에 두 번, 아니 이년에 한 번 정도 만날까 말까 한 사이였고 얼굴조차 가물가물했다. 그런 집으로 수호를 보낸다니. 두 분께 폐가 되는 일 아니던가. 당시 수호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애, 말하자면 인간보다 원숭이에 가까운 존재였다. 엄마가 안방 대신 병실의 간이침대에서 잠드는 이상, 작은 아빠 부부에겐 선택권도 없었다. 그러니 두 분의 ‘괜찮아요’를 정말로 괜찮아요로 받아들이는 것은 큰 실수가 되었으리라. 아니, 아니. 무엇보다 미국은 위험한 곳이었다. 뉴스는 늘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떠들었고 TED 또한 종종 총기 사건에 대해 말했으므로.

말하자면 나는 일종의 무사를 믿었다. 내게는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할아버지가 위독하고, 아빠의 사업이 흔들리고, 동생이 미국에 가고. 그런 건 ‘뭔가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 그다지 예쁠 것도 없고 재능 있는 데도 없고 자신의 유별난 데를 골똘히 찾은 뒤 은근히 기뻐하는 삶. 그러면서도 가장 안전한 자리로 돌아가는 방식이 익숙했다. 피자를 자르면서도 냉장고에 고들빼기가 있길 바랐다. 무침과 조림은 언제까지나 차가운 락앤락에 담겨 있었다.

오렌지 먹고 싶다. 엄마가 썰어주는 거.

안 먹은 지 한참 됐지.

응.

또 해달라고 할까.

응.

 

그러니까 반드시 엄마가 썰어주신 오렌지로 말이야.

 

장례식장 과일은 맛이 없다. 어쩌면 여름이 끝날 때였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가톨릭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추도 미사까지 지냈으니 과연 그는 신의 품에서 눈 감은 셈이다. 사실, 할아버지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발인이 끝날 때까지 쉼 없이 울었다.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지 못할까 두려웠다. 어떡하지, 우리 할아버지 어떡하지.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일을 했다는 사람. 젊었을 적 할머니의 뺨을 치고 아들들을 두들겨 패고 결혼식 날까지도 며느리를 쳐다보지 않았다는 사람. 어눌한 한국어를 쓰는 종업원에게 대놓고 혀를 차던 사람. 우리 예빈이, 우리 예빈이 하며 손을 쓰다듬어 주던, 내가 사랑하는 할아버지. 모로 봐도 그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발인 날 미사를 맡은 신부의 말을 기억한다. 우리 곁을 떠난 최용수 스테파노 형제님은 생전 두 손으로 삶을 일군 고결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꺼끌한 한복 위에서 주먹을 말아쥐며 되뇌었다. 고결한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러던 때가 있었다. 시큼한 과일과 함께 끝난 혹은 시작된 나날들이. 호시절이라 부를 수 없는 그것을 꽤나 좋아했다. 나는 그때를 이렇게 부른다. 아빠가 한 꺼풀 상냥했던 시기.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늦게 배웠다. 오렌지는 부드러운 과일이었다. 앞니가 닿기 무섭게 터지는 과육이라던가, 붉은 즙을 줄줄 흘리는 알갱이들, 사기 접시와 칠보 포크. 말하자면, 내게 오렌지란 알기 쉬운 단면을 드러낸 기름한 과일이었다. 그것을 자르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등 뒤의 일은 언제까지나 등 뒤의 일로, 텔레비전을 보며 오렌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짧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돌아와 으레 그러하듯 거실레 둘러앉은 어느 날에, 나는 엄마가 냄비를 닦거나 식탁을 훔치는 대신 우리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은 엄마가 이 시간에 소파에 앉아 있던 적 있었던가 되물었다.

여기 아주 오랫동안, 한복보다도 꺼끌한, 무언가 우둘투둘한 것이 있었다고.

거실 테이블에 놓인 오렌지는 둥글고 단단했다. 완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날부로 엄마는 소파에 앉아 오렌지를 썰었다. 저녁 식사 뒤 습관처럼 먹던 그것은 두 번 다시 같은 맛이 나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 아빠의 눈치를 살폈으나 아빠는 달라진 과일 맛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소변줄을 갈고 머리를 감기고 손발을 주무르던 엄마의 공로가 마침내 인정받은 셈이었다. 할아버지의 생일상이나 할머니의 제사상, 명절의 차례상을 깡그리 못 본 체하던 아빠도 상 치른 일까지 무시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과연, 삼불거. 조상의 지혜에는 깊이가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끝에 가정의 모습은 익히 알던 것으로 돌아갔다. 문 닫힌 서재라든가, 국물과 담근 김치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식탁이라든가.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가 오렌지를 등 뒤에서 깎는 일만은 벌어지지 않았다. 한 번 칼집을 냈다면, 과일 껍질을 아무리 모아본대도 원래대로 되돌릴 순 없는 것이기에.

엄마는 종종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럴만했다, 싶을 때든 영문을 알 수 없을 때든 내가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악을 썼다. 사실은 그 일들을 전부 기억하는 것은 당신뿐임을 알면서도.

잊히질 않는 거야. 특히 손발을 주무른 일이.

후에 단둘이 떠난 싱가포르 여행에서, 그는 맥주를 마시다 이렇게 말했다. 똥오줌 치우는 일보다도 손발을 주무른 일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는 것이다. 사서도 한다는 젊어서 고생에 이리저리 팔려 다닌 손은 마디가 불거지고 손톱이 다 뭉그러진 채였는데, 그토록 고된 청춘이……. 거기 보잘것없이 누워 있고. 평생 사무직을 벗어난 바 없는 엄마의 손은 그에 비할 수도 없이 온전했다. 그 손으로 살을 주무를 때면 평생을 호통치거나 호령하던 노인이 어린양처럼 물끄럼한 얼굴이 되었다. 엄마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묵묵히 할 일을 하며 그토록 많은 일들은……. 그게 다 저 노인에게 가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거였구나 싶어서. 눈에 차지 않는 며느리에게 몇 번이나 면박 주던 남자의 순한 얼굴을 보며 엄마는 많은 것을 느꼈다. 동정심이라든가, 억울함이라든가, 납득이라든가. 어떤 고결함은 그런 어휘들로 묘사되었다.

나는 엄마가 반쯤 취한 것을 알면서도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여기서 끊어가지 않으면 늙은이 욕심으로 들고 있다 괜히 상속세만 떼인 재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까봐서. 그러나 대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니까 예빈아. 너는 그러지 않아도 돼. 술 냄새가 훅 끼쳤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니. 그건 뭐랄까, 굉장히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붙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엄마의 손톱 근처에 거스러미가 올라 있었다.

스무 살 넘은 지가 언젠데요.

아직 애 같은 걸 어쩐다니.

좀, 여기저기 부딪쳐봐야 단단해지죠.

꼭 보드랍게만 있어도 괜찮아.

그러다 바람만 불어도 아프다고 드러눕게요?

엄마는 남은 손으로 관자를 집었던 것 같다. 싱가포르는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해가 질 때면 일사불란하게 조명이 켜졌다. 한점 흠 없이 깨끗한 도로들, 그것을 만들었을 사람들이 그림자 아래 묻히면 거리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조갯살을 삼킨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여자애는 좀 예민한게 낫지.

 

수호는 정말로 미국에 갔다. 할아버지가 떠나고 다음 해의 일이었다. 미국은 한국과 학기제가 달라 일단 가서 적응을 하고 어쩌고저쩌고. 무언가 복잡한 계산이 오갔으나 어디까지나 나는 모르는 일로, 인천 공항에서 파는 우동이 더럽게 맛이 없던 것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밤 짜증 나게 바깥 화장실을 차지하던 사람이 없다는 것에서 실감보다 체감이 먼저 이루어졌다. 칫솔을 물 때마다 괜히 계산기를 두드려보곤 했다. 한국 사는 부부가 아이 하나를 대학까지 보내려면 삼억 팔천이 필요하댔는데. 어학원 블로그는 미국 유학비로 한 해에 일억 정도가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은 최수호에게 들어갈 돈은 나에 비해, 한……. 많이 크다. 열일곱의 감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1억이면 집도 살 수 있지 않나? 가서 뭘 하길래 그만큼의 돈이 드는 걸까. 캘리포니아랬지. 그곳에 작은아빠 부부가 산다. 그곳에 코리아타운이 있다. 그리고 또, 그러니까. 오렌지가 많이 난다고 했던가. 그래도 괌이나 하와이랑은 많이 다르겠지. 가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는 것을 상상하려니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을 그 애는 알게 됐겠지. 기묘한 감각이 발가락을 간질였다. 일이 벌어진 틈새로 위화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매간에 또래라고 해도 학교를 갈라놓을 만큼의 나이차다. 그러니까 꼭 미국에 보내야 한다면 내가 가는 게 맞지 않았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 누우면, 종종 안방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호가 미국으로 떠난 때 즈음을 기점으로, 아빠는 있는 대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까닭을 먼 훗날 엄마와 외할머니의 대화를 엿듣다 알게 되었다. 그때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사업이 한한령에 직격으로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빠는 내리막을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집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었고 아빠 자신도 크게 실패하거나 실수한 적이 없었다. 바라는 걸 쟁취해 온, 성공 경험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사람이 견디기엔 너무나도 힘겨운 상황이었다는 것이 엄마의 설명이었다. 그때, 핸드폰을 보는 척 두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얼마나 경악했던가? 어른들이 애 하나를 그토록 쉽게 바보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그런 일을 꿈에도 몰랐다. 그해의 모든 것은 평범했다. 용돈의 액수는 변하지 않았고, 다니던 학원을 끊지도 않았는데.

아빠는 과일 써는 데 입 대지 않는 대신이라는 듯 모든 것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특히 저녁을 먹을 때면 빈정거리거나 고함치거나 식탁을 두들기는 습관이 되살아났다. 찌개가 흥건해서 가지가 차서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써서, 혹은 배추김치와 배추무침이 함께 올라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무언가를 꾹 삼키는 듯한 얼굴로 억지를 들어주거나 악을 쓰며 그에 화답했다. 식탁 긴 변의 한켠을 차지하고 앉아, 나는 그들을 내내 지켜보았다. 부모님은 내가 없는 것처럼 싸우다가도 내 접시에 갈빗대와 게딱지를 얹어주었다. 싸우는 순간에도 두 사람은 부모였다. 가장을 무시했니 이러다 한 대 치겠다느니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서 태연하게 밥이나 먹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날 선 공기가 아니라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욕과 굴욕에 관한 공감 그 자체였다. 십오 년을, 저녁 먹고 앉아 있을 시간조차 없이 부렸다면, 과일을 앉아서 깎는 것보다 나은 대가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주머니, 그렇지 않아요?

 엄마가 다시 직장을 구했을 무렵,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냉기를 쐬다 그렇게 물었다. 스팀 걸레를 데우고 있던 아주머니는 무엇이요, 하고 묻는 대신 애매하게 웃었다. 그제서야 괜히 말을 붙였다 싶었다. 할아버지를 간병하던 시절 뭔가 성에 차지 않는 점이 있었는지, 엄마는 원래 쓰던 사람을 자르고 새 파출부를 불렀다. 단적으로 말해 나는 그가 영 낯설었다. 주에 한 번 만나 세 마디 할까 말까한 사람과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나는 냉장고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냉장고 윗칸에 엄마가 틈틈이 만들어둔 반찬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우리 엄마 되게 요리 잘하는데. 요즘 김치 담가 먹는 집이 얼마나 된다고. 투덜거리고 있자니 한 박자 늦은 답이 돌아왔다.

사모님이 고생하기야 하죠.

말마따나 생고생이다.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는 데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풀렸다. 영문도 이유도 모르는 채 부부싸움을 견딘 게 몇 달. 나는 그렇게 아빠의 형편이 조금 나아질 때까지 우둘투둘한 분위기를 견디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빠가 이틀을 연속으로 오이지를 내오냐며 생트집을 잡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날따라 유난히 숨이 막혔다. 그는 삶에 있어 어떤 꼬들꼬들함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꾸득꾸득 온몸을 비틀어댔다. 엄마는 하필이면 그날 침묵했다. 오렌지 껍질처럼 우둘투둘한 구가 마음을 굴러다닌 끝에 툭,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아빠는 늘 그렇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내팽개치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말랭이랑 오이지 중에서 뭘 내갈지 고민해 본 적 없지. 이미 나온 음식을 가름해본 적만 있잖아. 자기 맘에 드는지, 아닌지. 결국 다 엄마 손으로 하는 일인데.

주먹을 꼭 말아쥐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것이 손에 힘을 준 탓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해버렸다, 는 감각이 목 뒤를 섬찟하게 만들었다. 생전 처음이었다. 생각하고 생각하던 말을 아빠 앞에서 내뱉은 것은.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란 후로 맞아본 적 없었으나, 만일 맞는다면 반드시 지금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한 마디 질문이었다.

너는?

아빠의 손은 제자리에 있었다. 비속어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무엇을? 다만 아연한 딸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예빈 너는? 태어나서 네 손으로 해낸 일이 하나라도 있어? 있으면, 들고 와 봐.

엄마가 따지며 끼어들었다. 그게 딸한테 할 소리냐, 같은 말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빠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래 나는 평생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일구거나 남의 몸을 주무르거나 오렌지를 써는 일들은 나의 소관이 아니었다. 스스로 고결해 본 적이 없었다. 고고해 본 적도 없었다. 엄마와 아빠가 실랑이하는 것을 보면서도 부엌에 가 엄마를 도운 적 없다. 나는 항상 소중했고 언제나 무사했다. 내가 느낀 일련의 불합리들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말하자면 나는 오렌지였다. 안전한 하우스 안에서 내가 단단해지고 있다고 착각했다. 때맞춰 물을 받고 벌레를 남에게 떠넘기면서. 과일보다는 수공예품처럼, 성장하기보다는 양육되며.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무엇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이 벌어지는 것과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아빠를 지적하는 대신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엄마가 썰어서 가져다주는 오렌지가 가장 달콤했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살코기만을 발라준 음식, 아무 염려 없이 청결한 집, 때맞춰 개켜지는 양말, 그 모든 것을 위해 언제까지나 등 뒤를 모르는 척 할 수 있었다면……. 내심 비웃거나 재 보던 사람들과 내가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같은 나무에 열린 사이였다면. 뒷면을 모르는 체하고 영그는 과일들이 있었다.

한심하긴.

씹어뱉은 아빠의 말이 유난히도 가슴에 박혔다.

 

엄마는 그날 밤 조용히 내 방을 찾았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아 어르며 물었다. 예빈아, 아빠 밉지? 나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엄마는 다 안다는 듯 내 손등을 토닥였다.

너 대학 가면, 미리 혼수해준다 치고 오피스텔 하나 내줄게. 들고 있는 방 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응? 우리 예빈이 어른 될 때까지만.

예상 밖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떤 수치를 겪고 충격을 받았대도 이 집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였나? 이 모든 것이 끊어질 수 있는 것이었던가? 어째선지 나는 새롭게 나타난 길이 내키지 않았다. 엄마는 내 표정을 뭐라고 읽었는지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학 다닐 때까진 본가에서 지내야지. 딸들은 좀, 부모 맘에 그런 게 있어.

나는 엄마의 품에 안긴 채 그 말을 곱씹었다. 하필이면 수호가 미국에 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니? 엄마의 물음에 나는 이렇게 답할 수밖엔 없었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침대에 누워 엄마가 말한 오피스텔의 가격을 검색해 보았다. 매매가 삼억 팔천. 이십 년어치 삶과 꼭 맞먹는 액수였다.

 

그날만큼은 누구도 싸우지 않았다. 누구도 비웃지 않았고 누구도 성 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수호가 작은아빠 부부와 입국하던 날에 말이다. 엄마는 귀한 손님을 맞는 것처럼 부산을 떨었다. 그 순간에서야 문득, 수호와 아주 멀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 해 만에 본 수호는 코 밑이 거뭇하고 목소리가 걸어져서,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작은아빠도 수호도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목소리를 높여 서로를 부르고 얼싸안았지만 내심 그들이 낯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로를 끌어안는 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가만 보니 작은아빠는 아빠의 턱선을 꼭 닮아있었고 수호는 눈매가 그대로였다. 뭐랄까, 눈빛이 묘하게 달라지고 피부도 그을렸으나 특유의 둥그런 선이 여전했다. 엄마와 작은엄마. 두 사람을 빼놓으면 모든 사람의 조형과 이목구비가 조금씩은 닮은 채였다.

우리는 예약해 둔 중식당으로 향했다. 본래는 한정식집을 예약하려던 걸, 한국식 중국 음식이 먹고 싶다는 작은 엄마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한식은 먹을 일이 많아요. LA는 코리아 타운도 잘 되어있고요. 전채로 나온 게살스프를 뜨며, 작은 엄마는 설명했다. 오히려 먹기 힘든 건 한국식 중식이나, 한국식 일식이나……. 뭐 그런 거예요. 짜장면 탕수육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제대로 된 디쉬하는 집 가려면, 어우. 말도 못 해요. 오렌지 치킨 같은 거 먹고 있으면 유린기가 간절하다니까.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들어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깐쇼새우와 앞접시를 내려놓고 조용히 방을 떠났다. 이내 작은아빠와 아빠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한국이 서비스 정신 좋다는 것도 옛말 같아. 미국에선 저러면 팁도 못 받지.

어딜 가든 있어. 센스 없는 애들. 왜, 당신 언니도 말야.

그 직원이 잘못하긴 했지만, 아니 그렇게 부르기엔 실수에 그치는 일이었지만, 그런데 인신공격도 아니고 이런 말들이 막 큰 잘못인지도 모르겠지만. 추가 주문한 깐쇼새우가 전채 직후 나오기에 좋은 음식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종업원을 흘기는 말로 시작한 아빠가 외가에 대한 것을 입에 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고개를 돌려 수호에게 말을 걸었다.

부활절 방학이랬나?

응.

돌아가면 또 고생이겠네.

그렇지 뭐.

그렇게 끝. 달리 할 얘기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시차로 인해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되었으니까.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같은 태권도장을 다니지 않았고 함께 숙제하는 일도 없었다. 수호는 애꿎은 새우 꼬리를 찔러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가 마뜩찮다는 표를 온몸으로 풀풀 풍기고 있었다. 어른들 앞에서 자알하는 짓이다. 작은아빠 부부만 아니어도 콱 쥐어박는 거였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수호를 보는 것이 싫지 않았다. 깐쇼 새우, 까짓거 일찍 나온 게 뭐 대수란 말인가. 수호는 슴슴한 스프보다는 다소 유치한 풍미가 있는 깐쇼 새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 어리지도 않은 동생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흐뭇했다. 아, 그렇구나. 문득 많은 것이 명쾌해졌다. 그 탓에 집에서 나갈 생각만큼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턱을 괸 채 이 자리를 빙 둘러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굳은 채였고 작은엄마는 곤혹스러운 티가 났다. 아빠는 약간 즐거워 보였다. 공벌레를 동그랗게 말거나 공들여 만진 찰흙을 눌러 뭉칠 때 짓는 표정과 비슷한 기색이 비쳤다. 가끔 그는 일부러 외가에 대한 화제를 꺼내곤 했다. 당신 아버지가 엄마에게 무슨 면박을 주었는지 알면서도. 작은아빠는 눈치도 없이 아빠의 대화에 어울리고 있었다.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답게. 수호는 식탁 밑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그런데 말이야. 이 모든 최악을 다 내가 사랑하면 어떡하지.

내 입에 과일의 가장 달콤한 조각을 넣어주던 사람들과, 세상의 모든 마뜩찮은 존재들을 싸잡아 욕하는 사람들이 같으면 어떡하지. 나이를 먹어도 유난히 선명한 기억들이 있다. 아직 걸음조차 서툰 아이의 손을 잡고, 삼십 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농촌 체험장 어귀를 걷는다. 잎사귀는 생명으로 젖어 반짝인다. 모든 오렌지들은 한알 한알 살아있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손을 뻗는 아이에게 기름한 부채꼴 모양으로 썰린 오렌지가 주어진다. 아이는, 나는 그것을 씹어 먹으며 여름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과즙이 줄줄 흘러 손발을 적셔도 정신없이 단맛을 만끽한다. 오렌지가 그렇게 좋으니? 예빈이는 오렌지가 좋아? 엄마가 삶은 손수건으로 내 손발을 닦아주는 동안, 아빠는 나를 단단히 품속에 안고 있다. 앞으로는 저녁 간식으로 오렌지를 내줘야겠네. 건조해 먼지가 많이 이는 날이었고 세 사람은 꼬질꼬질했지만, 아빠는 등 뒤로 오렌지의 벌레 먹은 부분을 파내서 버렸겠지만. 나는 뒷면을 보지 않으므로 그것은 반짝이기만 하는 옛날의 추억이다. 아니다, 지구가 구형이므로 사실 이곳에는 앞면과 뒷면이 없다. 우리는 모두 둥그스름한 하나다. 눈을 굴리며 적당히 모르는체 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나는 물어야 했던 거다. 속물이거나 건성이거나 폭력적이거나 혐오스럽거나 게으르거나 편견에 찌들었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석까지 사랑해서 당신들을 사랑하는 것인지. 당신을 사랑해서 그런 구석들까지 베어 물 수 있게 된 것인지.

아냐, 아냐.

사실 정답을 찾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고결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고결하다고 해도 천국에는 갈 수 없으니까. 고결하지 않은 것을 하지 않아야 천국에 갈 수 있으니까. 나를 닮은 이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다 함께 좋은 면만을 내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으니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서지 아니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차례였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아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우묵한 깐쇼새우 그릇의 가장자리를 세게 눌렀다. 가득 담겨있던 깐쇼새우 소스가 테이블 보로 후두둑 엎어졌다. 이내 흘러내린 소스는 엄마가 골라준 원피스를 물들였다. 흰 천 위로 오렌지색 물이 들었다. 아빠. 지금부터는 말야.

내가 당신의 실패가 될게.

당신이 고결하지 못한 일을 할 때마다 조금씩.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실수들을 보여줄게. 얼룩처럼 기미처럼 남아 있을게. 배게 위에 신물 나게 늘어지는 기억이 될게. 알 사람은 아는, 모임에서 소곤소곤 귓속말로 퍼져 나가는. 당신의 비극도, 죽을 이유도, 병의 원인도 되지 못할 작은 실패가. 한심한 사람이. 나는 안다. 조금 당신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림질된 셔츠를 입을 것이다. 구두는 정리할 것이고 숟가락은 씻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아빠의 팔을 긁을 거야. 하지만 아빠가 잘되면 기뻐하고 병에 걸리면 병문안을 갈 거야. 아빠의 소변줄을 갈아주고 드라이 샴푸를 열 개 들이로 주문할 거야.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싫어했던 조선족 간병인 따위에게 병상 옆자리를 내맡기지 않을 거야.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니까. 더러운 면이 있는 것은 문제없다. 그것을 잘 숨긴다면. 벌레 먹은 면을 내보일 기회가 없다면.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삼억 팔천의 의미였다.

접시가 덜그럭대는 통에 어른들의 대화가 멎었다. 침묵 속에서 작은엄마가 어머, 하고 입을 가렸다. 나는 그것이 실수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옷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훗날 작은 엄마는 형님의 자식 사랑이 대단하다 말했단다. 다 큰 애 옷을 닦아준다고. 수호는 가만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나는 되묻곤 한다. 그때, 만약 그 텅 빈 얼굴에 물어보았다면. 넌 거기서,

오렌지를 많이 먹니?

작은엄마도 네게 오렌지를 썰어주고 계셔?

그리고 부탁하는 법을 가르쳤다면. 수호가 다시 본가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고.

 

*

 

그 일이 있고서도 우리는 여전했다. 아빠는 꾸준했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한심한 짓을 했다. 종종 아빠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사업이 회복세에 들어섰다고 한 꺼풀 벗겨져 버린 것을 다시 봉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나와 아빠가 떨어져 지내면 모든 게 한결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지, 언젠가부터 나를 이끌고 둘이서 여행가는 일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었으므로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아빠가 실수하지 않는다면, 내가 따라 실패할 필요가 없는데도.

엄마가 손발 주무른 일을 그렇게 하듯이, 나는 개중에서도 싱가포르 여행을 오래도록 떠올렸다. 유별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야경을 보고 야시장을 거닐고 사자상과 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말했다. 엄만 이런 여행 좋다고. 슬프고 힘든 역사 같은 거 없는 도시에서, 딸이랑 낄낄대기만 하는 여행. 나는 말레이시아 연합이나 숙칭 대학살 따위를 떠올렸지만 그것을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이 도시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집은 없고, 오렌지 주스 자판기를 둘 곳은 있다. 비단 싱가포르뿐 아니라 모든 도시가 그랬다.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도시의 주스 자판기에서 오렌지 주스를 샀다. 그것은 오렌지 네 개를 통째로 착즙했다 광고하는 도시의 명물이었다. 어쩌면 관광객용 명소였을 수도 있다. 그 뒷면은 우리가 모를 일이다.

그 명물에 동전을 밀어 넣으면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내 종이컵에 어떤 불편한 구석도 없이 매끈하게 정제된 유황색 액체가 담겼다. 입안에 침이 고이는, 새금한 향이 났다. 엄마는 별게 다 있다며 허리 숙여 그 모습을 구경했다. 언젠가부터 가끔씩은 엄마가 아주 어린아이처럼 보이곤 한다.

아빠한테 한잔 사다 드려도 좋을 텐데. 그쵸. 우리 가족은 다 오렌지를 좋아하니까.

나는 엄마에게 그런 말을, 그가 소녀처럼 웃을 말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온 데 아빠의 오피스텔이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고 묻는다면 나는 침묵을 지키겠지만. 엄마가 컵을 들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 도시에서, 나는 엄마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단단히 얽힌 손가락 사이로 거스러미가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무사했고 앞으로도 소중할 터였다.

 

〈2026 제72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당선작 수상소감〉

신재인 학생(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신재인 학생(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인이 글은 늘 90에서 멈춰버리는 것 같아. 아니 75? 합평 시간에 그 말을 들은 뒤로 노트북을 켤 때면 늘 끝까지 쓰자고 다짐한다. 집요하게 굴 거야. 막장을 보여주마. 진짜 끝의 끝까지 간다. 그렇게 마음 먹어도 마침표를 찍은 뒤엔 아쉬움이 남았다.

듣말쓰에서 여기 오기까지 쌓인 파일이 많다. 삼억 팔천의 반의 반의 …… 반 정도. <삼억 팔천의 오렌지>는 여지껏 쓴 것들 중 가장 끝까지 가 본 작품이다. 유난히 바쁜 해였고 지하철을 탈 때마다 서서 졸다 엎어지길 예사였는데 지쳐 울다가도 꾸역꾸역 썼다. 부족한 작품으로 수상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생각해보면 뒤 돌아본 곳이 결국 끝나는 지점이지 싶다. 교수님 제 글이 재밌나요……. 저 진짜 잘 쓰고 있나요 어쩌구. 분기마다 흐물거리던 제자를 북돋아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오래 쉼표를 찍었을 것 같다. 실은 아직도 자신이 없다. 길 걷다 마주친 사람들이 들입다 작품의 감상을 전해줬으면 좋겠다.

나쁜 일과 좋은 일은 너무 떠들고 다니지 말랬는데, 가족들과 친구들, 학창시절의 은사, 그리고 항상 응원해준 너에게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소설을 읽어주신 모든 여러분께도.

그런데 작품이 작품이다 보니 조금 찝찝하다 해도 다디단 나날 되시라 해야할지, 단 것을 먹을 때도 텁텁한 뒷맛을 기억해주시라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 덕담일까? 단지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된 게 수상소감도 90까지만 쓰는 것 같다. 아니, 한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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