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이별 다리 <10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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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별 다리 <1062호>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14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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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1457년(세조 3년) 6월 22일 서울 동묘에서 황학동으로 가는 영도교(永渡橋) 다리에서 호송대장 어득해는 노산군 부인 송 씨에게 호령했다. 휘하 50여 명의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가로막았다. 노산군으로 강봉당한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과 송씨(1440∼1521) 부인은 다리에서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부인, 부디 자중자애하시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이것이 영영 이별이었다. 정순왕후는 1454년 1월에 열다섯 나이로 한 살 아래인 단종과 혼인했다. 결혼 생활 3년은 슬픔의 연속이었다. 1455년 윤 6월 11일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살핀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세종의 6남, 세조의 동생)을 제거하자, 겁에 질린 단종은 세조에게 양위하였다. 1년 후인 1456년 6월 단종 복위 사건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성삼문 · 이개 등은 거열형을 당했다. 1457년 6월 3일에 세조는 모화관에서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이윽고 명나라 사신은 경복궁에서 명 황제 정통제의 복위 조서를 반포했다. 세조와 그의 신하들은 극도로 불안했다. 명나라의 태상황 정통제가 복위되었으니 상왕 단종도 복위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위기감이 돌았다. 이러자 정인지 · 신숙주 등 세조의 측근들은 계략을 꾸몄다.

6월 21일에 백성 김정수가 전(前) 예문제학 윤사윤에게 “송현수와 권완이 반역을 도모합니다.”라고 말하자, 윤사윤은 즉시 세조에게 아뢰었다. 송현수는 단종 비 송씨의 부친이고, 권완은 단종의 후궁 권씨의 부친이다. 백성 김정수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그런 역모 정보를 얻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조는 송현수와 권완을 의금부에 즉시 하옥시켰다. 날조된 옥사가 분명했다. 곧이어 세조는 금성대군 저택에 유폐된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로 유배 보냈다. 세조는 교지(敎旨)를 통해 “상왕을 유배 안 보려 했는데 송현수 옥사가 일어나서 종친과 대신들이 유배 보내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6월 22일에 영도교에서 송씨 부인과 이별한 단종은 6월 28일에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단종은 청령포에서 두 달 정도 머물다가 영월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큰 홍수가 났기 때문이다. 관풍헌에서 단종은 매죽루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 특히 ‘자규사(子規詞)’는 지금도 매죽루에 걸려 있다.

달 밝은 밤 귀촉도 슬피 울 제
수심에 젖어 다락에 기대섰네.
네가 슬피 우니 듣는 내가 괴롭구나.
네가 울지 않으면 내 시름도 없으련만
춘삼월에는 자규루에 부디 오르지 마소.

9월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모의가 발각되자, 노산군은 10월 21일에 관풍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1457년 10월 21일자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지냈다.”고 적혀 있다. 이는 허위이고 날조였다. 2백 년 후인 1669년 1월 5일자 현종실록에서 진실이 드러났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그러면 단종 비 송씨는 어찌 되었을까? 그녀는 단종과 영영 이별한 뒤 폐서인되어 동대문 밖 정업원(淨業院)에서 살았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근처의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무사하기를 빌었지만 허사였다. 송씨는 궁을 같이 나온 세 명의 시녀가 동냥 해 온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궁핍은 더했다. 이를 보다 못한 동네 아낙네들이 쌀과 푸성귀 등을 사립문 위로 던져 놓고 갔다. 하지만 보고를 받은 세조는 부녀자들이 정업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을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이러자 동네 아낙네들은 다시 지혜를 짰다. 정업원 근처에 금남(禁男) 채소 시장을 연 것이다.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조정은 감시를 할 수 없었고, 여인네들은 채소 시장이 북적거리는 틈을 타서 곡식과 채소를 정업원 담 너머로 던졌다. 하지만 온정만으로는 끼니 해결이 안 되었다. 송씨는 자줏물 들이는 염색 일을 하였고, 그 천을 저잣거리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그런데 폭군 연산군은 1504년에 정업원을 훼철해 버렸다. 오갈 곳 없는 송씨는 비구니가 되어 바로 옆의 청룡사에서 지내다가 1521년 6월에 82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정순왕후의 무덤은 남양주에 있는 사릉(思陵)이다. 생각 사(思)의 사릉. 그녀는 오직 단종 만 생각하면서 외롭게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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