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대 열사 추모 특집호<10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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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열사 추모 특집호<1054호>
  • 오상훈 기자
  • 승인 2019.04.14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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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시선

200중 139. 지난해 4월 30일 발행된 본지 1038호의 통계조사에 따르면 양캠 학우 200명 중 139명은 강경대 열사를 몰랐습니다. 이는 강경대 열사가 학우들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명대신문은 강경대 열사(이하 강 열사) 추모 28주기를 맞아 학우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강 열사가 무엇을 위해 산화했는지 되새기고자 지난 1991년 5월 8일 명대신문이 제18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의 후원으로 발행했던 호외를 재구성하여 학우들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강 열사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당위는 무엇일까요?1991년 벚꽃이 떨어질 때, 91학번 새내기였던 강경대(경제 91) 동문의 피 또한 흩뿌려졌습니다. 학교의 일방적인 등록금 책정을 규탄하는 시위에 연락책으로 참여했다가 진압 전경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입학한 지 약 두 달 만에 산화한 것입니다. 강 열사의 죽음은 ‘87년 6월의 항쟁’을 재발시키듯 학생들을 분노에 들끓게 만들었습니다. 그해 약 200만 명의 대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는 7,852회*에 이릅니다. 학생들은 권위주의 정부의 전 정권 답습과 무자비한 공권력에 대항해 자신의 몸에 불을 댕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물론 투쟁 과정에서의 실수도 있었습니다. 전 문교부 장관이었던 정원식 교수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변명할 기회를 얻기에는 권위주의 정권과 관제 언론은 너무 막강했습니다. 유신 정권에 대항했던 김지하 씨는 한 언론사에 기고를 통해 분신을 시체 선호증이라 칭하며 ‘경박스럽다’고 평가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던 박홍 씨는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학생 운동 세력에 대한 여론은 급속히 나빠졌고 강 열사의 산화가 도화선이 된 5월 투쟁은 대학 운동 자체를 약화시키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요.

일부 사람들은 5월 투쟁을 보고 학생들이 지향했던 것이 인민민주주의라고 말하며 평가 절하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신념 체계이며 특정한 믿음 체계로 상대적이고 조작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대학생 개인의 삶은 어떨까요. 우리는 강 열사를 포함한 당시의 학생들이 개인의 삶을 일부 포기했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희미해져 가던 학생들의 권리를 위해, 10분 동안 950발의 최루탄**이 발사되던 광장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사실과 학생들 죽음의 원인이 공권력이었던 사실을 없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행태를 보인 학교와 당시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삶 일부를 대가로 바쳤던 것입니다.현재 학생들의 권리가 어디 즈음에 위치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청년 관련 통계는 학생들의 권리가 그리 높은 곳에 있지는 않다고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행복과 권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으나, 필자는 강 열사의 산화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위하고 투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청년을 부품으로 여기는 듯한 행태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성행할 때, 우리의 권리를 함께 주창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의식은 가지고 있자는 말입니다.

 *『경찰통계연보』 (1986~2000) 
**이동권, 『강경대 평전』, 민중의 소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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