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문, 성명서, 그리고 참회록 <10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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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문, 성명서, 그리고 참회록 <1054호>
  •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4.14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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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갈릴레이의 생애>

“자넨 무엇 때문에 연구를 하나? 학문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 현존의 노고를 덜어주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만약 과학자들이 이기적인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어 오로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데 만족한다면, 그런 과학자들은 학문을 절름발이로 만들고 말걸세. 나는 과학자로서 가능성을 갖고 있었네. 내 시대에 천문학이 시장에까지 도달했네. 그런 비상한 상황에 한 과학자의 의연함은 커다란 감동을 일으킬 수도 있었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인정하고 법정을 나오면서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학사학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갈릴레이는 저런 말을 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당시 재판이 각본대로 진행되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재판 중 발언과 판결에 대해 교황청과 갈릴레이 사이에 합의가 있었고, 갈릴레이가 불경죄를 인정하면 종교재판부가 사형 대신 가택연금을 선고하기로 합의하였고, 재판은 각본대로 진행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는 게 그들의 중론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영웅적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창조된 거짓말로, 저 한 문장으로 갈릴레이는 과학자의 양심을 상징하는 신화적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서사극의 창시자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갈릴레이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도 그 때문인 듯싶다. 나치를 피해 해외에서 저항활동 중인 자신의 처지와 300년 전 교황청에 굴복한 척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갈릴레이의 처지가 닮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실제로 초판본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이는 긍정적 인물로 묘사된다. 브레히트에게 이 작품은 압제에 굴하지 않고 항거하겠다는 결의문이자, 지식인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성명서였던 셈이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를 발표한지 7년이 지나 1945년 작품에 대폭 수정을 가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다. 원폭투하라는 미증유의 사건을 경험한 브레히트는 거기에 과학윤리를 저버린 과학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각성은 브레히트로 하여금 <갈릴레이의 생애>를 대대적으로 개작하게 만들었다. 초판이 한 과학자의 개인적 선택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면, 각색본은 그 선택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인용문 중 “만약 과학자들이 이기적인 권력자 앞에서 위축되어 오로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쌓는데 만족한다면, 그런 과학자들은 학문을 절름발이로 만들고 말걸세”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갈릴레이는 순교한 과학자에서 변절한 과학자로 추락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비판은 끝나지 않았다. 각색본에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철회한 이후의 삶이 추가되었다. 자택연금을 당한 후, 개인적인 연구에 몰두해 ‘기계역학과 낙하법칙에 관한 담론’을 완성한다. 이를 두고 제자는 갈릴레이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재판정에서 지동설을 부인하는 척했던 것이라며 갈릴레이를 추켜세운다. 자신을 영웅시하는 제자에게 갈릴레이가 말한다. 자신이 재판정에서 천동설을 인정한 이유는 순전히 육체적 고통이 겁이 나서였으며, 이후 개인적인 연구를 할 계획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내가 만약 저항했더라면 자연과학자들도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걸 발전시킬 수 있었을 거야. 자신들의 지식을 오로지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만 사용할 거라는 맹세 말일세. 나는 한 번도 진정한 위험 속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네. 결국 나, 내 지식을 권력자들에게 양도했지. 그들이 그 지식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말일세. 나는 내 천직을 배반했네. 나와 같은 짓을 한 인간은 학문의 반열에서 용납될 수 없네.”

저 말은 갈릴레이와 과학자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브레히트 스스로에 대한 자아비판이다. 스스로는 나치에 저항했다고 자부하지만 조국을 떠나 안온한 망명지에서의 저항이 실제적 저항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브레히트의 답변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각색본은 브레히트의 참회록인 셈이다. 거기에 핵심이 있다.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자신에 대한 객관적 성찰과 통렬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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