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는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1051호, 개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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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 <1051호, 개강호>
  •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3.0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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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날 억지로 살려놓을 거야, 그게 그 사람들 일이거든. 난 필요 이상으로 살고 싶지 않다. (......) 날 죽지 못하게 하려고 가혹행위를 할 거야. 끝까지 고생시키면서 우리에게 죽을 권리도 주지 않겠지. 그러니 날 입원시키겠다는 소리가 들리거든 네 친구들한테 마약 주사를 놔 달라고 해서 날 시골에 갖다 버려다오. 숲속에다가. (......) 내가 35년 동안 손님들한테 궁둥이를 내줬는데 이제 그걸 의사한테까지 주진 않을 거야.”
1975년 발표된 소설 「자기 앞의 생」의 한 대목이다. 왜 이 문장을 인용했는지는 맨 뒤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아마도 한번쯤 들어본 제목일 것이다. 소설이 이처럼 유명하게 된 건, 사실 소설이 거둔 문학적 성취보다 소설을 쓴 작가의 생의 이력에 기댄 측면이 크다.「자기 앞의 생」은 무명에 가까운 신예작가 에밀 아자르의 소설로, 그는 이 소설로 1975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6년 후, 전 세계 문학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프랑스 문단의 거장 로맹 가리다. 로맹 가리는 전투기조종사, 외교관, 작가, 영화감독 등 자신이 원하는 일은 모두 다 손을 댔고, 원하는 것 이상을 손에 쥐었다. 그는 전쟁 시 수훈을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장편소설「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거머쥐었다. 그런 그가 1980년 12월 2일,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물론 로맹 가리의 말년운이 그리 좋았다고 볼 수는 없다. 노년에 이르러 그는 한물간 작가 취급을 받았으며, 그가 연출했던 영화들도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사생활과 관련하여 확인되지 않은 추문들이 늘 그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그럼에도 거장의 자살은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당시 발견된 그의 유서에는 ‘마침내 나는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아직 더 큰 충격이 남아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프랑스 문학지에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글 한 편이 실리게 된다. 글을 쓴 이는 로맹 가리로, 거기에서 그는 에밀 아자르가 자신의 필명 중 하나였음을 고백하였다. 아마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죽음 앞에서 한 번 아연하고, 그의 고백 앞에서 한 번 실색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를 에밀 아자르와 비교해 퇴물 취급하며 물어뜯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프랑스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작가로 기록되었다. 참고로, 공쿠르상은 한 작가에게 한 번만 수여하게 되어있으며, 이 상을 중복 수상한 작가는 로맹 가리가 유일하다. 아직까지는.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더욱 유명해진 소설 「자기 앞의 생」이 지금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주인공은 모모와 로자. 성별과 나이, 인종과 종교,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지만, 기구한 운명만큼은 비슷한 두 사람이다. 포주와 창녀 사이에 태어난 모모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이며, 로자는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가 살아남은 후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노인이다. 연극은 로자가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시작해 그의 임종과 함께 끝이 난다. 제일 앞에 인용한 문장은 죽음을 예감한 로자의 유언이다. 따로 주석을 달지 않아도 인용문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존엄사가 사회적 논의로 시작된 건 1997년이다. 당시 식물인간 환자의 퇴원을 요구했던 보호자와 이를 허락한 의사에게 법원은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를 선고하였다. 이때부터 삶은 물론 죽음까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이 법적으로 인정을 받은 건 2009년의 일이다. 로맹 가리가 주장한지 무려 34년 만의 일이었다. 이렇듯 뛰어난 작품은 사회적 인식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자기 앞의 생」이며, 로맹 가리의 삶이다. 그의 유언 ‘마침내 나는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는 어쩌면 자기결정권에 대한 가장 명징한 증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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