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현실 사이, 갭이어와 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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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현실 사이, 갭이어와 휴학
  • 장지빈 기자
  • 승인 2017.06.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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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게?

한국의 휴학과 같은 개념인 갭이어(Gap Year)는 1960년대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제도이다. 갭이어는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전 상태인 학생들에게 휴식을 취하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라는 의미에서 시행됐다. 요즘은 그 범주가 넓어져 한국에서 불리는 ‘휴학제도’와 같이 대학생이 학기를 쉰다 는 맥락으로 쓰인다. 한국의 수많은 기성세대들은 대학생 때가 가장 좋을 때라며 여행을 다니며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으라고 한다. 하지만 취직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학생이 라면 이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 것이다. 휴학에 대한 기성세대와 사회의 부정적인 시각과 인식 때문에 쉬라고 주어지는 시간에도 쉬지 못하는 학생들. 당장 우리의 눈앞에 다가와 있는 얘기이다. 본래는 학생들의 휴식과 자아실현을 위해 시행된 휴학제도가 유독 한국에서만 취직의 준비 기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국 학생들은 어떻게 갭이어를 이용 하고 있고, 한국의 학생들은 갭이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Gap Year와 휴학의 GAP
1980년대부터 갭이어를 도입한 미국은 그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아이비리그 다트머스대학교의 경우 신입생들에게 입학을 1년 늦추고 갭이어를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며, 터프츠대학교 의 경우 합격자들에게 1년간 3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하는 식으로 갭 이어를 장려한다. 이외에도 많은 대학들이 학생들의 갭이어를 장려해 미국에서 갭이어를 활용하는 학생 수가 2015년 기준 3만 3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한국 대다수의 학교는 1학년 1 학기에 질병이나 입대를 제외한 사유로는 휴학이 불가능하다. 대학에 적을 두고 더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 수능을 다시 치르는 반수생을 막 기 위해서다. 교육부의 ‘전국 153개 대학 2014년 1학년 휴학 자퇴 현황’ 에 따르면 신입생 29만 4,855명 중 1학년 때 휴학 혹은 자퇴를 한 학생 이 17.2%나 됐고 이들 대부분은 반수생이라고 밝혔다.
외국의 갭이어는 진로와 개인의 미래를 준비하며 휴식과 자아실현을 위한 기간을 갖는 것이다. 1학년 학생을 제외하더라도 한국에 서 휴학을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외국 갭이어의 의의와 다르다. 중국 에서 우리대학으로 유학 온 Tan Quiang(경영 13) 학우는 “중국에서 는 학기를 쉬는 동안 여행이나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이 많기 때 문에 방학기간만으로 충분하다. 창업 준비나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 휴학을 하는 학생은 많은 편이지만 한국처럼 취직을 목표로 자격증 이나 영어성적을 얻기 위해 휴학을 하지는 않는다”며 한국 학생들의 휴학에 대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갭이어는 진로나 개인의 미래를 준비하고 인생의 설계와 자아실현의 의미가 강하다. 한국에서 대학 가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심심찮게 ‘휴학생 특강 토익반’ 혹은 ‘휴학 생 어학연수’ 전단지를 볼 수 있다. 외국의 갭이어는 말 그대로 쉴 틈 을 제공하는 반면 한국의 휴학은 더 높은 대학을 가기 위해, 혹은 스 펙을 쌓기 위한 시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스펙 한 줄 추가하기 위해 달리는 학생들 
각종 매체에서는 추억과 경험을 쌓으라며 대학생들의 여행과 휴학 을 장려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하지만 실제로 취업 시장에 뛰 어들어보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휴학이 나 졸업 후 공백 기간이 있는 청년이 입사 면접 시 그 기간 동안 무엇 을 했냐는 질문은 단골 소재인데, 여행을 했다거나 휴식, 아르바이트 를 했다는 답은 모범적인 답안이 아니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학생들은 마음 놓고 쉬어야 할 시간에도 공인영 어 점수를 올리거나 대외활동, 자격증 취득 등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 는 데 급급하다. 건국대학교 항공우주정보시스템공학과 1학년을 마 치고 휴학 중인 김영진 학생은 “군 제대 후 한 학기 동안 여행과 취미 생활을 하려고 추가 휴학을 신청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휴학한 기간 동안 남들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고 차라리 복학을 하거나 영어공부를 하라고 했다”며 “초중고 12년과 대학 1년, 군 2년까지 총 15년간 쉴 틈 없이 달려와서 쉬고 싶었지만 주변의 말이 틀린 것 같 지는 않아 이번에 토익학원을 등록했다”는 말을 전했다.

▲사진은 모 영어학원에서 휴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강료 할인 쿠폰이다.

 대학생들이 휴학연장을 기피하는 데는 나이 많은 신입을 꺼리는 기업 분위기도 한몫 한다. 취업사이트 ‘사람인’이 649개 기업을 대상 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들이 채용한 신입사원의 평균 연 령은 남성 28세, 여성 26세로 나타났다. 또한조사 대상 기업의 절반 이 넘는 333개사가 취업 적정연령이 있다고 답했으며, 신입사원 채 용 시 나이의 제한이 있다고 대답한 기업도 56.4%에 달했다. 연령제 한을 넘긴 지원자의 경우 △무조건 서류 탈락(41.9%) △동점 시 불이 익(39.2%) △감점 처리(18.9%) 등으로 불이익을 주고 있다고 답했다. 법에 위배되고 사회적인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연령 제한을 명시 하지 않았을 뿐 많은 기업들이 내부적으로 채용에 나이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한 인재를 채용한다는 대다수 기업의 인재상과 달리 모두가 같은 스펙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와 달리 필리핀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김현목(국통 15) 학우는 “내 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4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결 심했다”며 “SM Town에서 통번역 일을 하는 중인데 내 성격에 잘 맞 고 향후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두 달 후엔 일 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한국에선 학생들이 졸업과 취업 에 너무 압박을 받는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전했다.


‘休學’ 아닌 ‘携學’이 되어버린 현실 
외국대학의 경우 신입생에게 갭이어를 권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 지만 한국에선 대다수 학교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입학한 학기에 는 휴학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대학도 학칙 제19조(휴학) 2항에 따르면 입학한 학기에는 휴학할 수 없다. 다만 , 의무군복무와 질병으로 인한 휴학은 예외로 한다 는 조항이 있다. 2학기 휴학 후 수능시험 을 다시 치르는 ‘반수’라는 커리큘럼이 생긴 이유도 이 때문이다. 뚜 렷한 이유가 없다고 휴학을 제한하는 이 제도는 명백히 학생의 권리 를 침해하는 조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학입시를 위해 성적 과 활동 쌓기에만 전념해온 학생들은 성인이 되어 대학사회에 진출 한 뒤에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대학생 주간지 ‘캠퍼스 잡앤조이’가 2015년도에 서울 경기지역 3,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휴학의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취업준비’가 45%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에 휴식과 진 로 탐색을 위해 휴학을 하지 못하는 한국 대학생들의 휴학 불안을 빌 미로 ‘휴학 기간 200% 성공할 휴학계획 세우기’라는 이름의 워크숍이 생기기도 했다. 이 워크숍은 △대학생들의 휴학 이유 △성공 사 례 △준비사항 △목적 △타이밍 △계획서 작성 △피드백 등의 구성 으로 이뤄져 있다. 외국에선 휴학을 쉬는 개념으로 생각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는 휴학이 성공이고 어떤 휴학이 실패인 지 이분법적으로 나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대학 한국어학당 에 재학 중인 네덜란드인 Robin 씨는 “학생들을 성적으로만 판단하 는 한국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에선 많은 학생들이 A학점을 얻기 위해 너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 같다. 외국에서는 학 생의 경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처럼 외국에서 경험을 쌓고 다 양한 문화와 삶에 대해 배우는 것은 미래에 직업을 가질 때 매우 중 요한 요소이다.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니라 경험이다”라며 한국의 휴 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원종욱 보건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 2월 대한상공회의소 에서 열린 제13차 인구포럼에서 기업과 공공기관의 협조 하에 휴학 을 하거나 해외연수를 다녀오느라 늦게 졸업한 대학생에게 채용 시 불이익을 주자고 제안했다. 기업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휴학을 하고 스펙을 쌓을 수밖에 없는 답답한 현실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치열한 스펙위주의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휴학을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그 휴학이 취업까지 가로막고 있다. 한국사회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되돌아보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또한, 대입이나 취업을 목표로 하는 교육제도 때문 에 정해진 목표 없이 보내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휴 학은 休(쉴 휴)學이 아니라 携(이끌 휴)學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진은 ‘한국갭이어’의 갭이어 프로젝트 판매 내용이다.

 휴학 계획도 돈 주고 사는 사회 
각종 매체에서 대학생의 휴학은 주기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단골 소재이다. 그리고 그 소재의 결말은 항상 같다. 휴학을 하려거든 목 표를 가지고 해야 하며 그 목표는 토익, 자격증, 인턴 생활 등이어야 한다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외국판 갭이어 문화를 이식하겠다며 ‘한국갭이어’라는 회사가 만들어졌다. 안시준 대표는 ‘한국갭이어’ 를 “꿈을 꾸라고 말만 하지 말고, 청년들이 꿈꿀 수 있는 구체적인 방 법을 알려줘야 한다”며 국내 최초의 갭이어 전문 교육기관이라고 소 개했다. 사교육을 통해 대학에 합격하고, 또 사교육을 받아 취업을 준비하다 이제는 쉬는 방법까지 사교육이 필요한 사회가 됐다.
휴학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채로 3학년 혹은 4학년이 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너,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게?”이다. 마 치 휴학이 취업을 위해 대학 생활에서 꼭 넘어야 할 하나의 관문처럼 여겨지고 있다. 동시에 휴학을 한 학생들에게는 “휴학하고 뭐하려 고?” 혹은 “그냥 놀거나 쉬려고 휴학하는 거면 하지 마”라는 말을 건 넨다. 휴학은 대학생이라면 으레 한 번쯤은 해야 할 것이면서 동시에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는 기간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휴학 후 그저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학생들은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같이 준비할까”라며 두려움을 호소한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학의 교수는 휴학생으로 인해 노동시장으로 의 젊은이들의 유입이 늦어져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연간 11조 원 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쉽게 휴학을 결정하기엔 그 리스크 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휴학을 하고 나서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 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목적 없는 휴학을 지양하자는 분위기, 아무것 도 안 할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 바로 한국 대학생들의 현주소이다. 인생에서 한 학기, 혹은 1년도 마음대로 꺼내 쉬지 못하면서 그걸 나 의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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