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과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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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침묵
  • 김지은(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 교수
  • 승인 2017.04.30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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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침묵

질문은 알고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면서 시작되는 일이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고 나면 질문이 적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데다 자신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가끔 정해진 편 들기를 위해서 질문하는 척하고 준비된 답변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반면 어릴 때는 상대적으로 질문이 많다. 질문하면서 자라나고 물음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테두리를 확인한다. 그들의 질문은 처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소박하고 엉뚱하다. 생각이 달라지면 질문을 바꾸어 내놓기 때문에 새롭고 끊이지 않는다. 서로 다른 대답을 한 두 사람이 눈앞에 있어도 어린이는 그중 누구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쉽게 마음먹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질문이 날아갈지 모른다. 어린이가 질문하는 순간은 긴장해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질문이 많았지만 질문을 잘 하지는 않는 아이였다. 내 곁에도 손을 번쩍 들고 궁금한 것은 곧바로 묻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나는 주로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눈치는 빠르고 용기는 없었다. 어린 시절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는 편인데 세상은 이상한 것으로 가득했고 놀라운 일을 보면 나도 까닭을 알고 싶었지만, 질문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이면서 과밀학급으로 소문난 대도시 변두리 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출석번호가 81번이었고 교실에는 내 뒤로도 세 명이 더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의 사고를 막는 일만으로도 몹시 지쳐 있었고 교장 선생님은 2부제로 진행된 입학식 훈화에서 “선생님을 힘들게 하지 않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 말씀 잘 듣는 조용한 어린이가 착한 어린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교실에서도 가장 많이 들린 말은 “조용히 해!”였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걸 지키려고 노력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일은 선생님에게 큰 실례가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건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마음속 학교는 들어야 칭찬받고 못 듣거나 정확히 들으려고 물어보면 눈치를 받는 곳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항상 만나는 쌀집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저씨는 방범대원을 겸하고 있었고 민방위 훈련이 없는 날에도 왼쪽 어깨에 ‘방범’이라고 적힌 띠를 두르고 다녔다. 아저씨는 손님들과 이야기하다가도 누가 뭘 질문하기만 하면 종종 언성을 높였는데 “뭘 자꾸 물어보는 녀석들이 빨갱이다.”라는 말을 크게 외치던 기억이 난다. 아저씨 집에 연년생 딸아이가 넷이어서 “아무개 집에 있어요?”를 물어보는 어린이 손님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럴 때면 “시끄러운 계집애들. 저리 가라!”고 호통을 쳤다. 기가 약한 편인 나는 원래 덩치 큰 어른과 큰 개를 무서워했는데 그 아저씨의 고함은 표정까지 생생하고 나를 질문하지 못하게 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까지 버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갖고 있다.

그러나 질문은 입술을 다물고 억누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 질문은 책 속에서 진행되었다. 내 물음에 귀 기울여주고 성심껏 대답을 들려주었던 책이 없었다면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유년기를 제대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이, 책 속의 친구들이 말을 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어졌고 어디에 알릴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당시 여러 세대가 복작거리며 살던 우리 집에는 내가 책 읽는 걸 대견하게 생각해주던 몇몇 어른 동거인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각자의 사연으로 잠시 함께 살다가 어딘가로 떠났지만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이 볼만한 책을 구해다 주기도 했으며 그분들도 자신들의 책을 갖고 있어서 몰래 훔쳐본 적도 있다. 내 질문을 들어준 귀 기울여 사람들도 있었다. 그분들과 질문을 나누면서 이야기는 이렇게 즐겁구나! 처음 생각했다.

강의실에는 오늘도 침묵이 발언보다 더 자주 흐른다. 질문은 발언보다 더 적다. 물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우리의 공부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어린 시절 겪었던 질문에 대한 억압의 경험을 생각한다. 나는 학생들이 더 많이 물어볼 수 있는 강의실이 되도록 마음을 열고 있는지 스스로 묻는다. 우리가 더 많이 물어볼수록 강의실에서는 더 의미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

명진칼럼.jpg

김지은(방목기초교육대학 인문교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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