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배구 높이의 자존심 하경민(체육 01) 선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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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높이의 자존심 하경민(체육 01) 선수를 만나다
  • 권민서 기자
  • 승인 2016.09.12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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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배구 높이의 자존심
하경민(체육 01) 선수를 만나다
 

2005년 V리그가 창단할 당시에 입단하여 현재까지 12년 간 프로 리그에서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하경민 선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주역 중 한 명이었고 V리그 역대 여섯 번째로 블로킹 500개를 달성하는 등 수준급의 센터로 활약했다. 수술로 인해 은퇴를 고려해야 할 상황도 찾아왔지만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새 출발을 하는 삼성화재 블루팡스 배구단의 하경민 선수를 만났다.
 

프로필
● 생년월일: 1982. 7. 27
● 포지션: 센터 ● 소속팀: 삼성화재 블루팡스
● 수상경력: 2006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7 프로배구 V리그 올스타
2014 제 10회 NH 농협 2013~2014 V리그 남자 블로킹 500개 기준기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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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삼성화재와 재계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근황은 어떤가?
A. 2016 청주ㆍKOVO컵 프로배구대회가 9월 22일에 시작을 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고 있다. 정규 리그가 열리기 전에 하는 첫 대회이기 때문에 선수들과 호흡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해 계속 훈련하고 있다.
 

Q. 곧 새 시즌이 시작되는데 하루 일과는 어떤지 궁금하다
A. 거의 매일을 운동으로 보낸다. 아침 6시 10분에 체중을 재고 6시 50분에 식사를 한 뒤 9시 40분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등의 체력훈련을 시작해서 12시에 끝난다. 점심을 먹고 쉬었다가 3시부터 볼로 훈련을 하는 기술 훈련을 시작하고 끝나면 저녁을 먹는다. 몸이 많이 피곤하지 않으면 그 이후에는 개인 훈련을 한다. 개인 훈련은 볼 훈련의 일부분이나 웨이트 훈련 등 때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연습한다.
 

Q. 선수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지?
A.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현대캐피탈의 배구 경기 중계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 현재 삼성화재의 임도헌 감독님이 선수로 있었고, 지금 KB 손해보험 배구단의 강성형 감독님이 계셨던 게 기억이 난다. 공을 손으로 강력하게 때리고 그렇게 센 볼을 신기하게 받아내는 것이 재밌었다. 배구가 멋있다고 느껴서 막연하게 꿈을 배구 선수라고 쓰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아버지 지인이 벌교상업고등학교 배구부 감독으로 오시면서 배구 선수로 활동할 기회를 얻었다. 내 키가 남들보다 컸으니까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는데 마침 공부하기 싫기도 해서 한다고 했다. 벌교상업고등학교에서 1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해서 학교 대표로 시합을 나가며 공식적인 배구 선수로서의 활동을 처음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팀이 경기를 우승하고 내가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Q. 왜 우리대학에 입학을 했는지?
A. 고등학교 배구 선수들은 대부분 전국체육대회 전에 어느 대학을 갈지 거의 결정이 나지만, 나는 전국체육대회가 끝나고 감독님께서 한양대학교와 명지대 중 가고 싶은 학교가 어딘지 물으셨다. 처음에는 한양대를 가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명지대를 가면 한양대학교보다 기회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가서 게임을 몇 번 뛰면 나를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전적으로 동의 하셨다. 고3 때 명지대로 전지훈련을 갔었는데 명지대 감독님으로 계신 류중탁 감독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신 것도 이유 중 하나다.


Q. 명지대 배구부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
A. 당시에는 대학 리그가 1차ㆍ2차ㆍ3차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대학교 2학년 때 했던 2차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한양대학교와 치른 경기에서 탈락의 위기까지 갔지만 극적으로 한양대학교를 꺾고 4강에 올라갔다. 4강에서 경기대를 만났는데 객관적으로 우리 팀보다 실력이 좋은 선수들과 상대해 3대 2라는 점수차로 정말 아깝게 졌다. 하지만 기량을 잘 발휘했기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였다. 그 당시가 축제 기간이었는데 경기에 져서 아쉬워하자 감독님이 “축제잖아, 놀아”라고 하셔서 승패와 상관없이 곧 바로 재밌게 놀았다.


Q. 선배로서 우리대학 배구부에 아쉬운 점이 있을 것 같다.
A. 얼마 전 배구부 숙소를 들를 일이 있어서 가봤는데 내가 있을 당시랑 비교하니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10년도 더 된 건물들인데 변화가 없으니까 정말 낡아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이 우선인지 지원이 우선인지의 문제이긴 하지만, 선수 스카우트 부분이나 선수 지도 측면에서 지원이 돼야 배구부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명지대 배구부가 성적이 아주 월등한 편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졸업한 선수들이 현재 프로리그에서 뛰고 있다. 프로리그에서 뛸만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명지대에도 분명히 있는데 그 선수들이 재능을 충분히 꽃 피울 수 있게 선수 육성하는 차원에서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학비와 식비가 전부 면제였지만 요즘엔 그렇지 않다고 들었다. 선수들이 학비와 식비를 내면서 학교를 다니고, 경기일정 때문에 수업도 잘 듣지 못한다면 동기부여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Q. 명지대에서 배구부 활동을 하면서 좋은 추억도 많을 것 같다.
A. 좋은 동료들을 얻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성적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가장 배구를 재밌게 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선후배들이랑 아직도 돈독하게 지내는데 평생 갈 수 있는 동료들을 얻은 것은 정말 큰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Q. 다시 선수시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선수생활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없었는지?
A. 2012년에 프로 배구 승부 조작 사건이 터지고 같은 팀에 있던 선수들이 사라졌다. 상무신협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맥없이 졌다. 그때만큼 경기하기 싫었던 날도 없었던 것 같다. 또 1년 전에 마르판증후군으로 아팠을 때도 정말 힘들었다. 내 의도가 아님에도 강제로 은퇴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Q. 마르판증후군 때문에 은퇴 위기가 왔던 것인가?
A. 그렇다. 마르판증후군은 주로 장신 선수들한테 나타나는 질병인데 유전 질환이다. 사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 다른데 나는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 심장이 조이는 듯한 처음 느끼는 통증이 생겨 병원에 갔는데 마르판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장과 바로 연결된 혈관이 찢어지면서 피가 다른 부분으로 흘러가고 혈관이 부풀어 올랐다. 그전에도 이미 많이 부어있었는데 모르고 있었다. 이 혈관이 파열되면 생명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고 했다. 수술을 꼭 해야 한다고 했는데 수술에 관해서도 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어서 불안했다. 재발 위험성은 낮다고 했는데 그래도 가슴에 큰 충격을 받으면 위험하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고 다른 선수들보다 과격하게 운동을 하지 못하니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기에 조금 불리한 면도 있다.


Q. 그럼에도 선수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A. 의사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고 했고 무엇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의지가 있었다. 이후 대한항공과 계약해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확실하게 기량이 향상됐다. 점차 감각이 살아나는 것 같아서 다시 운동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대한항공과 재계약도 실패한 상황에서 삼성화재가 계약을 제의해 다시 기회를 잡았다.


Q. 운동선수로서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새 출발을 한다. 가지고 있는 각오가 남다를 것 같다.
A. 안 좋은 일을 당해 주위에 인간관계가 정리됐다.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계가 어긋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팀이 좋은 성적을 내고 나도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싶긴 하지만, 건강하게만 뛰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Q. 블로킹하는 타이밍이 좋다고 평가를 받는다.
A. 오래 운동을 하다 보면 경기를 관망하는 눈이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기회를 잘 잡을 때도 있다. 운도 함께 따라줘야 한다. 타이밍이 좋다고 해서 블로킹을 많이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기술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나이나 체력적으로도 괜찮을 때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합쳐져서 나오는 것 같다.

Q. 베테랑 선수인만큼 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것 같다.
A. 사실 그게 가장 부담스러운 말이다. 베테랑 선수이고 경험 많다고 평가되는 게 부담스러운데 지금 여기서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건 없다. 이제 팀에 들어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지금은 기존에 있는 선수들과 융화를 하는 시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쳐야 할 점이 보인다면 이야기를 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아니더라도 팀의 주장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같은 포지션의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내가 느낀 점을 얘기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주도적인 것 보다는 내가 이 팀에 녹아드는 게 우선인 것 같다.

Q. 선수 생활 중 가장 좋았던 일이 있다면?
A. 현대캐피탈에서 뛰었을 당시 팀이 우승을 하고 시즌 종료 후에 속공 1위랑 블로킹 1위를 했는데 개인적인 성적이 가장 좋았을 때라서 기억에 남는다. 2006년에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도 굉장히 기뻤다.


Q.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A. 아무래도 가족의 힘이 제일 크다. 가족은 말없이 바라만 봐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이고 힘을 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힘든 일을 견뎠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큰 원동력이 된다. 훈련을 다 끝내고 하루를 돌아보고, 일주일을 돌아봤을 때 그래도 ‘아, 이 힘든 일을 해냈네’하는 성취감이 좋다.


Q. 하경민 선수에게 배구란 어떤 의미인가?
A. 생활이고 일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배구를 참 좋아한다. 정말 좋아하고 정말 잘 하고 싶은 존재이다. 자발적으로 은퇴하기 전에 시즌 우승을 하는 것이 이루고 싶은 최종적인 목표이다.

Q. 우리대학 후배 배구부 선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대학 배구부에서 활동했던 동료들과 함께 후배들에게 간식이라도 해주려고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시합에 나간다고 하면 음료수 값을 하라고 돈을 보내주거나 조언을 해주는 정도다. 대학 시절에 선배들이 종종 와서 좋은 얘기를 하고 가면 많은 도움이 됐다.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Q. 하경민 선수에게 명지대란?
A. 정말 좋아하는 학교이다. 당시에 같이 뛰었던 사람들을 최근에도 만나는데 서로 학교에서 배구할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때가 가장 젊기도 했고 뭘 해도 재밌었다. PC방에 모여서 게임을 해도 재밌었고 경기도 정말 즐기면서 뛰었다.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한 곳이기도 해서 큰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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