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바다 속 길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페이지들이 생기고 수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페이스북은 젊은 세대들이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창구라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창구를 꽤 부담 없이 이용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 길거리에서 본 광경들을 터치 몇 번으로 쉽게 수면 위로 올린다. 부당한 대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더욱 유용하다. 파란 창구 너머의 그들은 자상하고 관대해서 ‘도와주세요’라는 말에 쉽게 반응한다. ‘좋아요’가 만 개를 훌쩍 넘어가면 묻힐 뻔 한 일은 묻히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언론이 막고 있으니 우리가 도와주자’는 자극적인 문구에 사람들은 더욱 들끓는다. ‘좋아요’ 하나 누르고 마치 내가 언론에 대항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린 진정한 알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억울한 일이 묻힐 일도 없고, 더 이상 정부가 사건 사고를 쉬쉬한다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던 ‘투명한 사회’는 실현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은 이렇다. 우리는 너무 쉽게 들끓고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상 진실은 안중에도 없다. 가장 적당한 예로 온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세모자 사건’ 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목사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수없이 성폭행을 당했고, 심지어 그들이 운영하는 교회에서 성매매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이 영상은 빠르게 인터넷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경찰청 사이트에는 세모자를 구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그들을 구해줘야 한다며 소리쳤다. 몇몇 페이지에서는 ’허목사‘가 언론을 매수해 어디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며 ’우리‘가 나서야한다고 선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모자’사건은 한 마디로 사기극이었으며 사람들이 분노하던 사건의 전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이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페이스 북 어디에서도 세모자 사건을 화두로 삼는 곳은 없다. 성난 군중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터넷은 잠잠하다. 우리는 손쉽게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만큼, 왜곡된 사실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야가 편협할수록 그 틀에 갇힐 수 있으며 정작 알아야할 사실을 외면하게 되기 십상이다.
박영진(문창 14) 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