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5)
상태바
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5)
  • 구희주
  • 승인 2014.12.13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마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올바른 사용법 (5)


6. 내용상의 사실 여부는 본 출판사에서 확인해 줄 수 없다

 

2012년 12월 31일 밤, 나는 번화가 근처에 있는, 큰 종이 있는 공원에 나갔다. 종소리를 들은 다음엔 망년회자리에 나가야 했다. 공원은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학창시절의 아침조회 때보다 많아보였으니, 몇 명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치여서 큰 움직임 없이 흐느적거렸고, 추워서 그런지 양발을 번갈아가며 동동거렸다. 누구랄 것 없이 그랬다. 앞사람들의 뒤통수만 바라보면서, 그 모습이 마치 좀비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로, 이중에 좀비 한마리만 있으면, 이곳은 금방 아수라장이 될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형편 좋게 좀비가 등장할 리가 없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좀비도 많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집한 곳에 좀비가 없으면 어디에도 좀비는 없다는 것이다.

종이 울렸다. 언젠가 들어봤던, 공기를 가라앉히고 귀를 무겁게 때리는 소리였다. 언제 들었는지는 금방 기억이 났다. 여름에, 런던 올림픽이 열릴 때 울렸던 그 종소리와 비슷한 소리였다. 좀비사태에 대한 경종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종소리 말이다.

 

물체에는 각각 고유의 파동이 있다. 그 중, 달의 파동이 마치 텅 비어있는 듯, 종의 파동과 흡사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어떤 음모론자는 이것을 이용해 어떤 음모론을 펼쳤다. 달의 크레이터는 수성처럼 좁고 깊은 것이 아니라 넓고 얕게 패여 있는 점. 달의 공전속도와 자전속도가 거의 비슷해서, 지구에서는 도저히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점. 왜 수성과 비슷한 크기의 달이, 오롯이 한 행성이 된 것이 아니라 고작 지구의 중력에 붙들려 지구의 위성 역할이나 하는 점 모두를 설명하는 음모론이었다.

음모론자의 주장은 고대 외계인의 비밀기지 설이었다. 고대에 노예로 부리기 위해 원숭이의 품질을 개량한 외계인이(이 품질을 개량한 원숭이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감시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세운 기지가 바로 달이라는 것이다. 크레이터가 얕게 패이는 이유는, 위장하기 위한 지표의 바로 아래에는 금속과 같은 단단한 구조물이 있기 때문이고, 공전과 자전이 일치하는 것은 지구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달의 파동이 종과 흡사한 것은 달의 내부는 사실, 텅 비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생각이지만, 동시에 재미만 있는 생각이었다. 재미밖에 없다는 말은, 어쩐지 나쁘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라고 여기게 된다. 항상 재미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헛웃음은 나오자마자 하얗게 입김이 되어 달을 향해 올라갔다.

 

그런데 달이 굳이 필요한가? 생각해보면, 애매하다. 조수간만의 차나, 지구에 이것저것 내가 모르는 영향을 끼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감각적으로 느끼자면 그건 달이 지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아닌, 한마디로 보너스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달에 대한 인류의 입장은 언제나 애매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읽은 책의 후기를 인용하자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달이라니, 저렇게 쉴 새 없이 모양이 바뀌는 불성실한 것에다 맹세하지 말아요’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 주제에, 또한 영어권에는 ‘달이 존재하는 한 확실히’같은 속담도 있는 모양이다. 옛날 사람들도 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난감했던 듯하다. 딱히 필요성 같은 건 크게 와 닿지 않는 주제에, 밤하늘에서의 존재감만큼은 압권이니 뭐, 그럴 수밖에. 어쩌면 옛날 사람들은 달에 태양과 같은, 어떤 필요성을 부여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달빛에 마력이 깃들었다느니, 달을 보면 늑대로 변하느니 운운하는 전설들도 어쩌면 그런 이유일지도.

종 주변을 비추는 불빛이 워낙 많아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달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저 달이 사실은 공갈빵같이 되어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비슷하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수없이 봐오던 달이었지만 오늘 따라

떠 있는 달이 묘하게 가벼워보였다.

 

집에 와서, 「좀비서바이벌가이드」를 뒤적였다. 몇 번씩 읽었던 책이지만 뭔가 빠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제법 두께 있는 책이지만, 내가 빠뜨렸을 만한 부분은 얼마 없었다. 나는 맨 뒷장을 펼쳤다.

그곳에는 좀비사태의 감시요령과, 사태추이를 메모하기 위한 공란이 몇 페이지에 걸쳐 있었다. 그 뒤로는 지금껏 읽지 않았다. 별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장을 넘겼다.

맨 마지막, 360쪽 다음 장의 표지와 본문 사이의 자투리 페이지에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경고 (……) 2.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역사적, 기술적, 사회적)들은 저자의 최초 출간 본을 그대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내용상의 사실 여부는 본 출판사에서 확인해 줄 수 없다.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비서바이벌가이드」의 내용은 전부 좀비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가정 하에 쓰였다. 좀비사태가 일어났었다 거나,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여부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좀비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의 확답 정도는 내려줬으면 했다. 그런 확답조차 없다면, 이 책을 충실히 참고한 내 반년이 무용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하지만 동시에,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이 다룬 모든 내용이 단순한 허구고, 그래서 내가 별 쓸모없는 노력을 쏟아 부었다고 해서, 그게 뭐 어쩠냐는 생각 말이다. 그동안 돈과 시간과 노력을 필요 없는 곳에 갖다 버렸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필요한 것은 뭐지?

 

집에 오자 책상위에 있던 달본이 가장 먼저 보였다. 밖에서 달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한 것 때문이었다. 책상 구석에 있던 달본은 먼지로 덮여 있었다. 암스트롱이 착륙하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암스트롱이 달본에 착륙할 리 없기 때문에, 휴지로 먼지를 닦았다. 밤이 늦다 못해 새벽에 가까웠기 때문에 얼른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무심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둠속에서 둥둥 떠 있는 초록빛 구체였다. 그것은 지금껏 상상해오던 좀비의 눈동자와 닮아있어서, 나는 이불 속에서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그 형형한 빛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너무나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원의 외곽은 약간 흐릿했다. 나는 조금 진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눈동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달본이었다. 내 책상 언저리에 쓸모없이 자리하고 있었던,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던. 지금껏 그것이 야광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침대에서 책상 구석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본 위에 있던 먼지를 닦고, 무심코 책상 가운데에 놓아두었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누워서 달본을 계속 바라봤다. 야광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필요 없는 물건이, 밤에 빛나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굳이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정말이지 요만큼도 필요가 없었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났지만, 유감인지 다행인지 좀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 대비를 계속해오고 있다. 이 글이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슬슬 좀비가 나타나, 피 말리는 사투가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등장인물인 내가 드디어 미쳐버려서, 지나가는 사람을 좀비라 착각하고 정글도로 두개골을 쪼개버렸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으면 재밌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아쉬웠다. 내가 사는 세계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고리타분하며 틀에 박힌 듯 일정했다. 내가 좀비라도 이런 세계에는 나오고 싶지 않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아이티에서는 아직까지도 시장에서 좀비가 목격되었다, 는 제보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모든 인류에 잠재되어 있는 레트로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죽지 않고 무한 증식하는 것이 세포에만 국한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좀비에 대한 대책은 필요하다.

사실은, 필요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 인문캠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거북골로 34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2층
  • 자연캠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명지로 116 학생회관 2층
  • 대표전화 : 02-300-1750~1(인문캠) 031-330-6111(자연캠)
  • 팩스 : 02-300-1752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승환
  • 제호 : 명대신문
  • 창간일 : 1954년 11월
  • 발행인 : 유병진
  • 편집인 : 송재일
  • 편집장 : 한지유(정외 21)
  • 디자인·인쇄 : 중앙일보M&P
  • - 명대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명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jupress@hanmail.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