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체념이라는 구원과 만나다 _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11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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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체념이라는 구원과 만나다 _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1126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3.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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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그때, 그 시절. 나는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과거의 내가 거기 있다. 다 챙겨서 온 줄 알았는데 그 시절의 나를 두고 왔다. 그때, 그 장소. 나는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후회 없이 훌쩍 떠나온 줄 알았는데, 그 시절의 나는 여전히 그곳에 오도카니 남았다. 힘껏 던져도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야 마는 어떤 날의 나는 어쩌면 다른 선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과 손잡고 여전히 그때의 시간에 서 있다.

12살 나영(그레타 리 분)과 해성(유태오 분)은 서로를 첫사랑이라 생각하는 친구다. 어느 날 나영은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12년 후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에서 살고 있다. 우연히 나영은 해성이 SNS를 통해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영상 통화로 다시 인연을 맺지만, 바람과 달리 둘은 만나지 못하고 소심하게 헤어진다. 또다시 12년 후, 해성은 나영을 직접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하고 오랜 기억이 인연이 될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은 두 사람은 잠시 만났다 다시 헤어진다.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는 12년을 간격으로 세 번, 윤회처럼 만났다 헤어지는 나영과 해성의 이야기다. 기대와 달리 아련하고 간절한 첫사랑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멜로 영화는 아니다. 삶의 변곡점 같은 순간에 함께하는 두 남녀를 통해 시간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하는, 슴슴하고 건조하지만 깊은 맛의 영화다. 찬찬히 나영과 해성이 흘려보낸 24년의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통찰과 놓아버린 감정을 딛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나의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영화는 두 명의 동양인 남녀와 한 명의 백인 남성이 함께하는 순간을 관찰하면서 맘대로 상상하는 대사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 대사를 통해 동양인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렇듯 〈패스트 라이브즈〉는 왠지 모를 불편함과 이물감을 주는 구석이 있다. 우리는 조국을 떠나 해외에 자리 잡은 수많은 한국 출신 이민자에 대해 꽤 많이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타인의 나라에서 이물감이 살짝 남아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불편함에 온전히 익숙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영화 속 인물들의 소통이 묘하게 삐걱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어보다 한국어가 더 서툰 유태오의 연기와 가끔 전달되지 않는 그레타 리의 대사 때문에 몰입이 안 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감독이 그 낯선 이물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고 느낀다. 익숙하게 들려야 할 한국어가 서툴게 들리고, 얼른 자막이 나왔으면 하는 순간, 월컹대는 관객들의 감정까지도 영화의 온도이자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영과 해성이 정말 그리워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닌 것 같다. 모든 로맨스는 자기중심적으로 편집되는 장르다. 순정이라는 것 또한 내가 만들어낸 미련을 그린 내 마음의 수채화같은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 그때의 내 예뻤던 감정, 설레고 아프고 먹먹했던 그날의 맑았던 하늘인 것 같다. 그래서 나영과 해성은 24년 만에 만나 함께 하지만, 각자의 과거 속 소년과 소녀를 계속해서 소환한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일까? 미련을 부리면 미련하게 살게 된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나의 삶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남기고 온 지난 시간과 미련의 손을 놓아야 내일을 살 수 있다. 나영과 해성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상대방을 놓아준다.

그렇게 나의 기억과 화해하고 뒤늦게 펑펑 울고서야 12살의 나를, 24살의 나를 흘려보내고, 그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진다.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땅에 질질 끌리는 감정의 꼬리를 딱 끊고, 과거의 시간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는 건 축복과도 같다. 과거를 전생처럼 살아온 그들이 결국 체념이라는 희망을 만나는 순간은 좀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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