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윤의 페미니즘 산책] ‘아프면 안 되는 시기’의 건강권 〈1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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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윤의 페미니즘 산책] ‘아프면 안 되는 시기’의 건강권 〈1125호〉
  • 구지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필진
  • 승인 2024.03.11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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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필진
구지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필진

‘아프면 안 되는 시기’만큼 부조리한 말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으며, 이는 헌법에도 명시된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흔히 건강은 신체적, 정신적 질병이나 장애가 없거나 혹은 완전히 치유된 상태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지극히 특정한 상태의 몸을 ‘정상’으로 상정한 결과이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는 누구도 제대로 된 건강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건강과 건강권에 대한 논의는 장애와 질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을 삭제하지 않고,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와 상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랬을 때 건강권은 질병과 상해에 노출되지 않고 일하거나 살아갈 권리에 더해 ‘장애 있는 몸으로 차별받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아플 땐 적절한 치료를 받고 충분히 쉴 수 있는 ‘잘 아플 권리’까지 포괄한다. 그런데 정부가 건강권 보장에 소극적이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건강권을 침해한다면 정부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4일 헌법재판소는 주 52시간 상한제 를 합헌으로 판결했다. 헌재는 한국에 이미 장시간 노동이 관행적인 데다, 근로 시간을 유연화할 경우 노동자의 건강 · 안전 및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노사가 합의를 거친다면 주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 개편을 추진하려던 정부 정책을 사실상 차단하는 결정이다. 정부는 주 69시간제로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했을 때, 초과 근무 시간을 휴가로 적립하고 대신 장기 휴가를 쓸 수 있다는 ‘장점’을 피력했다. 그러나 기존 휴가도 눈치를 보며 쓰는 현실에서 장기 휴가는 그림의 떡이다. 따라서 헌재의 합헌 결정이 노동 환경 개선 및 노동자 건강권 보장을 위한 노동시간 상한 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판례기에 의미가 크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주 52시간제가 최선인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건강할 수 없다. 주 52 시간제가 도입된 이후에도 2022년 기준 한국은 OECD 평균 노동시간보다 연 155시간 더 일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적게 일하고 많 이 버세요”, “들숨에 건강을, 날숨에 재력을” 이라는 말이 덕담으로 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병원을 갈 수 없어 마음대로 아플 수 없고 ‘아파서도 안 되는’ 상황이 또 다른 이유로 연일 지속 중이다. 최근 정부의 의사인력 확대 방안에 반대한 전공의들의 집단 의료거부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강한 의지와 나날이 심각해지는 의료 공백으로 보아, 정부와 의사 간의 대립은 좀처럼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대립 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의대 정원이 아니라, 이것이 과연 시민들의 건강권에 얼마나 기여하는가다. 정부의 의사인력 확대 정책은 언뜻 보기에 감소하는 의사 증가율을 해결하고, 의사 1인당 과도한 업무량과 노동 시간을 줄여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공의료 확대 및 강화와 공공보건의료인력 증원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의료 서비스의 수준과 의료 기관 접근성 보장을 수익성에 따라 움직이는 민간병원 중심 시장에 무책임하게 맡기는 것이다.

정부는 의료공백 문제의 미봉책으로 지방의료원, 군병원, 경찰병원 등 공공병원의 진료시간을 늘리고 응급실을 개방하는 ‘비상진료대책’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공공병원은 전체 의료기관 중 단 5%에 불과하므로 대형 병원들의 기존 환자들을 모두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또한, 민간병원이 메르스와 코로나19 유행 시기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필수 진료를 꺼려, 이때 발생한 환자의 대다수를 얼마 되지 않는 공공병원이 책임져야 했다. 특히 지난 2년 코로나19 시기에 공공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적자는 오롯이 공공병원이 떠안게 되어 이들의 재정과 기능은 더욱 위축되었다. 의료 시장에 얼마나 더 많은 의료인을 내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시민들이 얼마나 충분히 필수 의료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건강권의 관점에서 노동과 의료 시스템을 바라보면,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식은 명확해질 수 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 시간 단축과 공공의료 확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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