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당신이라는 깃발이 펄럭입니다_영화 〈갈매기〉 〈1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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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당신이라는 깃발이 펄럭입니다_영화 〈갈매기〉 〈1125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3.11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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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칼럼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운동회가 열리면 운동장에 만국기가 걸렸다. 하늘을 가릴 만큼 빼곡하게 걸린 깃발들이 펄럭거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사실 아무도 깃발 하나하나를 관심 있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원래 깃발이란 펄럭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러다 말겠지. 바람이 그치면 축 늘어지겠지. 그냥 그런 거라고, 그냥 저러다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랑곳없이 유난히 혼자, 바람이 불건 말건 더 팔딱팔딱, 나를 좀 봐달라고, 나는 살아있다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고, 외치듯 흔들리는 깃발도 있었던 것 같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오복(정애화 분)은 큰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눈치 없는 남편과 철없는 막내딸은 늘 그녀에게 걱정을 안겨준다. 그러다 시장 상인회에서 술을 먹은 날 험한 일이 벌어졌다. 상처받은 오복은 싸우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 편에 서서 도와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말한다. 한강에 배 한 번 지나간 거라고, 젊은 사람 발목 잡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만 오복은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가만있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김미조 감독의 〈갈매기〉는 60대 여성이 겪은 성폭행 사건 이후를 그리는 영화다. 무척 논쟁적이고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이지만, 감독과 배우들 모두 신중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보는 과정이 불편하지 않다. 누구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누구도 주인공보다 앞서 화를 내거나, 동정하거나 포악해지지 않는다. 김미조 감독이 주인공이 극악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건'을 앞서 바라보지 않고, 사건의 파도에 휩쓸린 후, 상황에 빠진 '사람'을 먼저 살피기 때문이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엄마라는 역할, 어쩌면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놓을 수 없는 오복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혹시 나에게 피해가 올까봐 망설이는 사람들의 이기심도, 함께 맞서 격렬하게 싸워주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의 현재도 오복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 내 목소리 한번 내놓아본 적이 없는 한 중년 여성이 드디어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려는 순간, 그 무기력함과 망설임도 묵묵히 인정하면서 결국 나, 라는 인권을 발견하는 순간을 응원한다.

〈갈매기〉는 회상 장면 하나 없이 오직 오복의 현재만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거의 시간이, 그날의 기억들이, 오복을 상대했던 사람들이, 그것에 대응하는 오복의 자존감이 현재의 오복을 만들었다는 것을 굳이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알고있다.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힘주지 않았던 김미조 감독은 오복의 변화만은 꾹꾹 눌러쓴다. 그래서 오복의 인생 페이지의 뒷장에도, 관객들의 마음에도 짙은 자국이 남게 한다.

힘센 두 날개를 가졌지만, 계속 뭍에서 어슬렁거리는 갈매기처럼 오복은 온전히 자신만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엄마이자 아내로 살아왔더니 여성으로서의 오복은 지워지고 없다. 그러니 비로소 여성, 그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딸에게 그날 일을 힘겹게 털어놓은 후, 용기를 내어 찾아간 경찰서 문은 그날따라 이유 없이 잠겨있다. 앞으로 오복이 맞아야 할 세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선의를 가지고 오복을 도와주길 바라지만 '선의'라는 명사에 따르는 동사는 '베풀다'이다. 베풀다가 내포하는 것이 희생, 포기, 관용, 용기라는 점에서 타인에게 선의를 요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복은 이제 나를 위해 선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친다.

오복은 인생을 뒤집어 버린 사건을 겪었지만 기묘하게도 이 사건은 오복 이외의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도, 사람도, 가족도 어떤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오복은 바뀌었다. 누군가가 봐줄 때까지, 내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펄럭이기로 결정한 순간 오복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 결심이 너무나 단호해서, 그 깃발이 펄럭거리는 소리를 따라 오복을 바라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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