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하나만 건너면 사람들이 있다, 대학과 학교 앞 상권의 공생 이야기 〈1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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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만 건너면 사람들이 있다, 대학과 학교 앞 상권의 공생 이야기 〈1125호〉
  • 황성용 대학보도부장, 이수아 사회문화부 정기자
  • 승인 2024.03.11 14: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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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있으면 자연히 상권이 자리 잡는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가’는 자연스레 ‘번화가’로 통용되는 이유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옛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대학 상권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숫자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가게들도 휘청거렸다. 하지만 눈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다.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대학생만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가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게 안에서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들은 학생보다, 어쩌면 교직원보다도 여기에 오래도록 머물러왔다. 그들은 학생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본지는 이번 기획을 통해 거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들을 만나봤다.

 

〈군산식당〉 Since 2010

한국인을 관통하는 공동의 서사, 한식의 힘.

군산식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늘 똑같이 보이는 풍경이 있다. 식탁이 5개뿐인 가게 안에 젊은 청년들과 양복을 입은 중년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바글바글 뒤섞여 찌개에 코를 박고 있다. 어쩔 땐 밖에서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이토록 평범하디 평범한 메뉴에 열광할까? 자극적인 맛에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 날이 오고, 그 허기는 엄마 밥만이 채워줄 수 있으므로. 이곳은 딱 그런 곳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7천 원에 엄마 밥을 먹을 수 있는 곳.

 

Q. 클래식한 외관과 저렴한 가격이 인상 깊어요.

김만석 사장님: 우리 부부가 이 가게에서 음식을 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한 14년 정도. 하지만 군산식당이라는 간판은 1980년도부터 있었죠. 사람은 세 번 바뀌어도 그냥 이름은 계속 군산.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특별한 게 하나 없는데도 학생들이 계속해서 우리 가게를 찾아오시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물가가 가정식을 변형시켜 버렸어요. 예전에는 가정식 하면 생선이 꼭 상에 올라갔는데 물가가 요동치니까 더 이상 생선을 올릴 수 없었죠. 그래서 우리 가게는 생선이 찬으로 나갈 순 없어도 메뉴에 꼭 더해놨습니다. 원하시면 부담 없이 선택할 수 있도록. 지금은 먹고 돌아서면 바로 배고플 시기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학생들이면 고봉밥을 만들어서 줘요. 제 생각에 명지대학교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주역이 되실 분들이니까요. 잘 먹어야죠.

Q. 찌개 종류 9개, 조림 2개, 볶음 요리 2개에 백반까지…. 가짓수가 엄청 많아요.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무엇인가요?

김만석 사장님: 가장 인기있는 메뉴랄게 없어요. 왜냐면 정말로 골고루 팔리기 때문에요. 요즘 학생들은 제육 볶음을 많이들 먹던데, 제육볶음을 너무 많이 먹는 어떤 학생에게는 먹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제육 때문에 살이 많이 쪄서 고생했거든요.(웃음) 한 번 찌면 잘 빠지지 않아요.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해요. 또 우리가 매일, 동일하게 손님들과 지키려 하는 약속은 맛이 있든 없든 모든 반찬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점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Q. 사장님께서는 음식을 내주실 때 꼭 손님들과 스몰토크를 하시는 거 같아요. 학생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김만석 사장님: 이곳은 평범해요. 특별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매일 오셔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 가시면서 “잘 먹었습니다”하고 인사하시면 그날 하루에 피로가 확 풀려요. 요즘 가장 눈에 밟히는 학생들은 이번 여름 졸업을 앞둔 졸업반이에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우리집 아이가 과거에 많이 고생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제 눈에는 사실 무슨 짓을 해도 다 예뻐 보여요. 예를 들어서 어떨 때는 남녀 학생들이 이 좁은 가게에 와서 심할 정도로 애정 표현을 많이들 하거든요. 그런데 그 모습도 보기 좋아요. 자기 내면에 있는 감정들을 솔직히 내보이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 때는 왜 그러지 못했지’하는 후회가 남아요.

 

〈학창시절〉 Since 2008

사장님 부부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내는 학생들

“사장님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묻는 말에 “‘그냥 사장님’과 ‘학시 이모’로 불러줘”라고 답하시는 사장님 부부가 있다. 사장님과 학시 이모는 그렇게 불러도 “명지대 친구들은 다 안다”며 성을 붙일 필요도 없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이 자신감의 원천은 사장님 부부와 학생들의 꾸준한 친밀함이다. 1월 1일 제야의 종이 울릴 때면 매번 함께 술잔을 들어 올리는 것이 그것을 증명할 터, 이모와 사장님과 학생들이 서로를 반기는 건 당연한 이치다.

 

Q. 오랫동안 학교 앞에서 장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뭔가요?

학시 이모님: 인천공항 앞에서 학창시절을 시작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명지대학교 앞으로 온 이유는 인천공항 앞에서 공항 직원들과 있어 봤으니, 젊은 친구들하고도 시간을 보내보고 싶었어요. 대학가 장사는 처음이라서 상가 지하에서 작게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남들이 다 쓰는 완제품을 사다 쓰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한 입 먹어보니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작은 부분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소스까지 직접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내 아들딸을 키울 때 해 먹였던 요리들과 똑같은 레시피로 해주고 있어요. 사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와서 “엄마가 해준 맛이에요”라고 할 때 좀 뿌듯하긴 하죠. 품이 많이 드는 일이더라도 제가 모든 메뉴를 직접 만드는 이유에요. 우리 가게의 대표 메뉴인 ‘막삼구이’는 막창과 삼겹살을 같이 굽는데, 저는 이 메뉴를 학생들에게 빨리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막 창의 냄새를 잡기까지 그럴 수 없었어요. 결국 비결을 찾아서 얼마 전 학생들에게 내놓았답니다. 자그마치 7년이 걸렸어요.

Q. 매일 명지대 학생과 만나시는데, 특징이라고 하면 무엇이 있을까요?

학시 이모님: 일단 명지대 학생들은 젠틀해요. 항상 고마운 건 한 번도 학생들과 서로 큰 소리를 내거나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어요. 예전에도 명지대 학생들은 늘상 밝고 명랑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 예뻐 보이더라고요. 반면 미안한 점이 있다면, 지하에서 학창시절을 운영하던 시절엔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서 “너 승우 아니냐?” 아는 체 하면 놀라는 얼굴들을 보는 것이 참 좋았는데. 요즈음엔 얼굴들만 익숙하지, 이름은 가물가물하더라고요. 아, 기자님 얼굴도 익숙한데?

Q. 학시 이모와 사장님의 인생 목표가 궁금합니다.

학시 이모님: 전 그런 거 없어요. 명지대 친구들이 좋아하는 집, 나는 그거면 됩니다. 장사를 하며 돈을 못 버는 것도 미련하지만, 저는 적당히 벌고 이렇게나 즐겁고 젊게 살 수 있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목표보다는 여기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늘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 학생들 덕택에 나와 남편도 나이 먹은 줄 모르고 살아요. 우리 나이에도 친구들과 호응하고 함께 호흡하며 놀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 학생들을 만나면서 이 세대를 이해하고,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식들도 이해하게 됩니다.

 

〈모래내곱창〉 Since 1987

“명지대 분들이면 저희 가게는 한 번쯤 와보셨죠?”

이 동네의 오랜 유지, 모래내곱창은 한결 같다. 큼지막한 ‘모래내곱창’ 간판과 창가에서 곱창을 볶는 아주머니, 그리고 왁자지껄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무릇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랜 기간 사랑받는 가게의 법칙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중적인 맛과, 저렴한 가격, 적당히 많은 양, 한결같음이 그 법칙이다. 그러니 모래내곱창이 40년 가까이 사랑받은 건 당연한 수순이다.

 

Q. 언제부터 이 자리에서 장사하셨나요?

윤영준 사장님: 장사 시작한 거는 37년 정도 됐고요, 이 자리로 이사 온 지는 한 15년 됐습니다. 모래내시장에 있다가 재개발되면서 여기로 온 거죠. 손님분들이 꾸준하게 좋아해 주셔서 잘 된 케이스 같아요. 명지대 분들이면 여기는 한 번쯤 와보셨잖아요. 그렇죠? 저희 가게를 모르기는 힘드니까요.

Q.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윤영준 사장님: 학생들이 워낙 많이 찾아주고 단골도 많다 보니 졸업하고 나서 사진 찍으러도 많이들 오더라고요. 명지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쭉 오시던 손님들도 있고 엄청나게 어린 손님도 있습니다. 아이를 뱄을 때부터 계속 오시던 손님이 아이가 어느덧 스무 살이 다 되었더라고요. 한 번은 그 가족의 3대가 함께 오셨는데 가족분들이 다 좋아해주시니 좀 뿌듯하더라고요.

Q. 명지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있나요?

윤영준 사장님: 손님으로 오시면 언제나 환영합니다. 요새 한 3~4명이서 5만 원으로 배불리 먹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저희 가게는 4명이 와도 3인분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어요. 원래 그 양은 아니었는데 점점 늘다 보니 이제 줄일 수가 없더라고요. 사장님 철칙이 ‘가격은 올리더라도 양은 줄이지 않는다’거든요. 항상 명지대 학생분들께는 고마워서요, 오시면 최대한 잘해주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맛있게 해주려고 하고요.

 

〈만득이네 두루치기〉 since 2005

“잊혀지지 않는 가게가 됐으면 좋겠어요”

친척을 따라 온 낯선 곳, 하지만 가게 이름은 친근하게 지었다. ‘만득이네 두루치기’. 고 사장님은 늘 웃으며 학생들을 반겨준다. 학생들을 보기만 해도 즐겁다는 고 사장님의 미소는 ‘맛도 그대로, 양도 그대로’라는 철학만큼 고집스럽다.

 

Q. 가게 이름이 왜 만득이네 두루치기인가요?

고정희 사장님: 옛날에는 만득이가 좀 친근한 이름이었어요. 잘 지은 것 같아요. 만득이, 만득이… 입에 잘 붙는 것 같아요. 가게 이름은 ‘두루치기’이지만 학생들은 파불고기나 제육도 너무 좋아하고 어른들은 또 쭈꾸미를 좋아하십니다. 학생들하고 만난 건 2005년도부터예요. 꽤 오래됐어요. 근처에 친척이 있어서 오게 됐는데 너무 좋아서 안 떠나고 여기 있는 거에요. 어른들보다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너무 좋습니다. 남들이 내가 일을 하면서 항상 웃는다고 그러거든요. 근데 진짜 웃을 일밖에 없는 것 같아요.

Q. 코로나19 전후로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고정희 사장님: 일단 코로나로 정말 힘들었어요. 코로나 때는 배달 장사를 시작해서 버텼습니다. 지금은 내가 그만둘 때까지는 가격은 좀 오르더라도 맛도 그대로, 양도 그대로를 고수하는 게 목표에요. 코로나 전후로 달라진 점이라 하면, 술 문화가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코로나 전에는 막 모여서 먹는 분위기였다면 코로나 후에는 그런 게 조금 줄어든 것 같습니다.

Q. 가게 하시면서 언제가 제일 뿌듯하셨나요?

고정희 사장님: 학생들이 참 인사성이 밝아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참 즐겁습니다. 잘 돼서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고, 선물을 주고 가는 졸업생도 있고 좋은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가게가 참 재수 좋은 가게라고 그래요. 졸업생들이 일부러 여기서 모임 가질 때도 뿌듯했던 것 같네요. 학생들에게는 항상 고맙다고 말하는데, 정말 그게 진심이에요. 고맙고 감사해요. 만득이네가 잊혀지 않는 가게가 됐으면 좋겠어요.

 

〈짜우반점〉 Since 2018

학생들에게 맑고 큰 집이 되다

“난 면 종류는 차돌 짬뽕, 밥 종류는 마파두부, 요리 종류는 크림 새우가 가장 좋아요” 방 사장님께 대표 메뉴를 묻자 하신 답변이다. 방 사장님이 좋아하는 음식이 곧 대표 메뉴이며,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Q. 짜우는 무슨 의미인가요?

방윤섭 사장님: 짜우는 저를 잘 아시는 분이 지어다 준 이름입니다. 중국 황실 마당에 깔린 대리석의 이름이 짜우래요. 맑고 크게 되라는 뜻이랍니다. 옛날에는 가족의 가업을 나도 물려받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저는 형제들이 중국집을 했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길로 빠질 수 없었고, 그래서 저도 형제들의 길을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것도 이 주변에서 20년을 살다 보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이 동네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사람도 친구 같고, 부모님 같은 친밀감이 있고, 학생들도 섞여 있어서 활기가 넘치거든요. 언제까지 이 가게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누구나 쉽게 찾아서 편안히 먹고 갈 수 있는 그런 집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Q. 사장님의 장사 모토는 무엇인가요?

방윤섭 사장님: 제 모토는 저보다 손님에게 초점을 두어서 손님께 맞춰주는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셔서 누구나 행복한 식사를 하시고 가시면 좋지만, 사실 음식이란 것은 100%의 만족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손님께서 취향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더 시원하게’ ‘더 매콤하게’ ‘더 많은 양’을 이렇게요. 그럼 전 최대한 맞추려 노력합니다.

Q. 사장님께서 가장 뿌듯하실 때는 언제인가요?

방윤섭 사장님: 학생들이 식사하시고 뭔가를 잘 놓고 가요. 자그마한 것부터 큰 것까지. 잘 놓고 가는데, 잘 찾아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나중에 와서 “혹시 2주 전에 습득하신 에어팟 없냐”고 전화해서 물으실 때 가장 뿌듯해요. 가장 많이 놓고 가시는 물건이 에어팟이에요. 많을 땐 일주일에 3개씩은 쌓이는 것 같네요. 또 학교에 재학하는 외국인 학생들이 와서 말이 통하지 않다보니 생겼던 난처한 상황을 이야기해요. 저는 그 상황에 맞는 대처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 학생이 다시 상황을 바로잡는 걸 볼 때 뿌듯한 것 같아요. 그렇게 기억이 남는 외국인 단 골 손님들은 귀국하고 집에 가실 때 “저 들어가요”하고 인사하러 오세요.

 

〈명지사진실〉 Since 1988

장인은 20년이 지나도 내 사진을 알아본다

설렘을 담은 입학 사진, 패기로운 마음으로 도전하는 얼굴이 담긴 운전면허 사진, 어딘가 경직되어 보이는 취업 사진, 졸업 사진까지. 4년간 대학교에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 일은 참 많다. 35년간 우리 대학 학생들의 사진을 도맡아 책임지는 사진관이 있다.

 

Q. 지금껏 사진관에 어떤 굴곡이 있었나요?

신이현 사장님: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 학생들이 사진 찍을 확률이 많아서 이 학교 앞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 이후에 위치를 옮긴 적은 없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돌이켜 보면 imf 터졌을 때나, 사회적 재난이 있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코로나 시기도 물론 많이 힘들었습니다. 코로나 때는 사람들이 외국을 나가지 못 하니까 여권 사진을 전혀 안 찍었었죠. 1980년대와 90년대 초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에 저희 사진관 앞, 그러니까 학교 정문 앞 거리는 항상 시위대로 가득 찼었어요. 사진관 앞에 보도블럭도 몇 개 빠지고, 날아다니는 화염병에 맞아서 저희 간판도 다 탔었는데.(웃음) 학교에서 몇 개월이 걸려서 보상해 주긴 했었어요.

Q.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면?

신이현 사장님: 1990년대, 2000년대 초반까지는 결혼식 말고도 약혼식을 많이들 했었어요. 아기가 태어나면 백일 사진과 돌 사진도 꼭 했었고, 어르신들 칠순 잔치 회갑 잔치도 꼭 했었고요. 그런데 요즘엔 약혼식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추세가 되어서 사진 찍으러 오시는 분이 거의 없어요. 칠순 잔치, 회갑 잔치가 사라지고 있고요. 그래서 저에겐 요즘이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힘든 때예요.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20년 전에 제가 찍어준 사진이 출장 나갔다가 우연히 걸려있는 걸 발견했을 때예요. 손님은 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는 제가 찍은 사진을 적당히 다 알아보거든요. 제가 찍어준 약혼식 사진, 돌사진, 어르신들 잔치 사진을 발견했을 때 그때 보람을 느끼죠.

Q. 학생들에게 해주고픈 말은 무엇인가요?

신이현 사장님: 어쨌든 저희 가게를 찾아와주시는 손님 중 70%가 명지대생들이에요. 학생들이 많이 찾아와서 30년이 훌쩍 넘도록 4인 가족이 먹고살았어요. 학생들이 없었다면 제가 여기서 어떻게 영업하면서 버티고 있었겠어요.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에또커피〉 Since 2014

10년간 학교와 함께한 카페

리에또 카페는 늘 분주하다. 점장님은 늘 즐거운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는다. 학생, 교직원, 교수님들까지 모두 손님이다. 앉을 새도 없이 바쁘지만 꼭 한 마디씩 건넨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오늘도 점장님은 손님들에게, 학교에게 즐거움을 전한다.

 

Q. 가게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이세라 점장님: 2014년에 영업해서 이제 10년 된 것 같아요. 2년 정도 ‘카페 띠아모’로 있다가 프랜차이즈를 떼고 현재까지 ‘리에또 카페’ 영업 중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장은 아니고 점장이에요. 학교에서는 팀장님이라고 불러주시더라고요. 옛날에는 학교에 다른 카페들과 햄버거 프랜차이즈가 있었는데 저희가 가격도 더 저렴하고 옆에 학생 식당이 있었다 보니, 좀 잘 될 수 있던 것 같아요. 코로나 기간에는 손님이 많이 없어서 2년 정도 문을 닫았었고 mcc관에 새로 식당이 생겼을 때도 발걸음이 많이 없어졌었습니다. 학생회관 3층에도 식당이 생긴다고 해서 언젠가 열겠지… 하며 버티고 있던 것 같아요.

Q. 항상 손님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세라 점장님: 손님이 메뉴를 주문하신 후 서로 서먹하게 있는 분위기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과 교감하려고 날씨 얘기를 한다거나 안부를 묻는다거나 합니다. 손님들한테 제가 좀 많이 다가가는 편인 것 같아요. 손님이 다음에 오셔도 이야기가 이어질 정도로요. 손님들과 많이 이야기하다 보니 메뉴에 대한 피드백도 듣곤 합니다. 여자 교수님들은 요즘 라떼 칭찬을 많이 하시고 남자분들은 스무디 종류를 많이 찾으십니다. 그리고 기존에는 바닐라 라떼에 시럽을 사용했는데 파우더로 바꾸고 나서 굉장히 인기가 좋아졌답니다.

Q. 어떨 때 가장 뿌듯하신가요?

이세라 점장님: 자주 왔던 학생들이 졸업식 날 부모님들 모시고 와서 “여기 사장님이 저 되게 잘해주셨어요” 라고 할 때나, 군대 갔다가 휴가 나와서 들리거나 할 때 뿌듯합니다. 그리고 남자친구나 여자친구 생기면 데리고 오기도 하고 해서 가족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요. 나이를 떠나서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졸업식 날에는 뭐라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초콜릿 같은 걸 사놓고 하나씩 주기도 했어요.

 

〈주인백파스타〉 Since 2008

“아끼면 망한다” -주인 백-

“싼 재료를 사용하면 싸게 팔 수는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한때는 대학가 사정에 맞게 싸게, 많이 팔던 백 사장님은 고민 끝에 가게 컨셉을 바꾼다. 과거에는 명지대학생 맛집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대학가’ 맛집은 주민들의 성에 차진 않았다. 백 사장님은 고민 끝에 장사 철학을 바꾼다. 이제 백 사장님은 더 좋은 재료로, 더 좋은 ‘요리’를 만든다.

 

Q. 가게 소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백종호 사장님: 우선 ‘주인백파스타’는 제가 백씨여서 주인백파스타에요. 저희가 2008년에는 명지대 후문에 있었어요. 거기 생선구이집 하나 있죠? 그 자리가 1호점 자리에요. 이쪽에서 장사한 지는… 2017년이니까 한 7년 정도 됐습니다. 저희 이모님이 오픈 멤버신데 시작할 때 부터 마늘빵을 만드셔서 이제 장인이 되셨습니다. 기존에 마늘빵이 딱딱한 마늘빵이었다면 저희 가게는 버터를 바르고 오븐에 적당히 구워서 바로 손님들에게 드리니까 부드럽고 촉촉해서 상상했던 맛이 아닌 것이죠. ‘장인 마늘빵’이 저희 가게 1등 메뉴입니다.

Q. 요즘 학생들 많이 오나요?

백종호 사장님: 처음이었어요. 작년에는 학기 중에도 장사가 잘 안되더라고요. 대학가니까 양 많이 주고 무조건 저렴하게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렇게 못 합니다. 옛날에는 손님이 다 학생들이었는데 코로나 이후로 너무 달라졌어요. 뭔가 끊어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계속 선배들이 데려오고, 그 후배들이 또 데려오고 하는 게 뚝 끊겨버린 것 같아요. 거기에 물가도 많이 오르다 보니 학생 손님이 많이 줄었어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주민분들이 더 많이 오시는 것 같습니다.

Q. 요즘은 학생들이 많이 안 보여서 서운하시겠어요.

백종호 사장님: 예전에는 10시 반만 되면 가게가 꽉 찼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네요. 예전에는 저렴하고 양도 많고 해서, 명지대 맛집으로 유명했습니다. 저도 대학 시절이 있었고 주머니 사정이 뻔하잖아요. 학생들 위주로 즐겁게 장사하고 싶었는데 이제 그게 안 되더라고요. 졸업한 친구들이 한 번씩 오면 깜짝 놀랍니다. 주변에 가게 들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그래서 옛날 향수 느끼려고 저희 가게를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다가 졸업해서 아기 낳고 가족이랑 오는 친구들도 있고, 와서 옛날 쿠폰 보여주는 친구들도 있어요. 와주면 참 반 갑더라고요. 예전과 많이 바뀌었어도 자주 와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AfZ문구점〉 Since 1995

오래 자리를 지킨 문구점은 사회 변화를 몸소 체감한다

사장님은 요즘 일생일대의 고민 중에 계시다.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30년이 다 되가는 문구점의 경로를 정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사장님께서는 ‘특별한 능력이 없어서’ 문구점 사업을 계속해왔다고 하셨지만, 사장님은 아실까. 사장님의 능력은 가게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도, 학생들의 모습이 바뀌어도, 학교 주변에 생기가 사라져가도 오랜 시간 한자리를 묵묵히 지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도 갖지 못하는 ‘진짜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Q. 어떻게 명지대학교 앞에서 문구점을 열게 되셨나요? 

김순현 사장님: 저는 고등학교도 명지대 인근 충암고를 나온, 완전 이 지역 토박이에요. 이 지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고, 서울시 전체로 봤을 때 임대료도 비싼 편이 아니어서 다른 지역으로 보금자리를 옮길 이유가 없었지요. 사실 처음부터 문구점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는 원래 두산 마케팅 팀에서 일했는데, 갑작스레 퇴직을 하게 되어서 문구점을 차리게 되었어요. 저만 나온 게 아니라 팀에서 여러 명이 같이 나와서, 그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문구점이 ‘AfZ’문구랍니다. 저는 AfZ의 공동 창립자인 거죠.(웃음) 사실 처음에는 팬시점 사업이 굉장히 잘 됐었어요. 지금은 6개 정도 남았지만 예전엔 전국에 한 20개 있었나. 처음엔 지금 크기의 반 정도 됐었으나 건물도 인수하고 확장도 했으니, 성장을 많이 했지요. 그런데 5년 전부터는 의식적으로 규모를 줄이고 기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중고등학생들이 한 반에 60명 정도 있던 시절에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20명 이하로 떨어지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세상이 바뀐 게 확연히 체감되면서 문구가 점점 사양산업이 되는 걸 느껴요.

Q. 학생들이 많이 드나드는 팬시점이니, 학생들의 변화가 더 크게 실감되겠어요. 학생들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나요?

김순현 사장님: 그렇죠. 특히 코로나19의 영향이 큰 거 같아요. 과거에는 신학기가 되거나 학교에서 큰 행사가 있으면, 우리 가게까지 활기가 흘러넘쳤는데 코로나19 시기에 비대면 수업을 하면서 생활 습성이 많이 바뀐 거 같아요. 예전에는 과 모임도 많고, 2차, 3차도 많이 가더 니 요즘엔 그런 모습을 거의 못 보는 거 같아요. 늘 우리 아들이나 또래의 대학생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내가 장사를 시작할 당시에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되게 잘 됐어요. 그때 당시에는 세상이 확장 되는 시기였으니 누구나 다 그랬지. 사실은 내가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언제부터는 구조적인 변화가 힘든 상황에 도래한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늘 있어요. 아저씨로서.

 

명지대학교 앞엔 오래된 가게들이 많다. 그들은 학생과 함께할 수 있어 웃기도 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 울기도 한다. 어느날 보면 폐업해 있는 가게도 있으며 새로 들어서는 가게도 있다. 변하지 않는 건 그들과 우리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다.

서대문구 일대 상권 보호를 위해 힘쓰는 ‘명지월드’ 는 “학생과 소상공인을 연결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게 목표”이며 “학교와 상권이 상생하는 관계로 인식돼 상권 활성화와 동시에 더 좋은 서비스가 이뤄졌음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남가좌 생활상권 추진위원회 ‘남이동길’은 “코로나로 선후배 간 연결이 단절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드러내며 “학교 앞 가게들이 학생들이 왔을 때 ‘여기 너무 괜찮은 곳이야’ 생각하게끔”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너무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19로 거리가 텅 비어도 이곳에 발붙이고 견뎌온 사람들이 있다. 졸업한 선배들의 기억 한 켠에 박힌 사람들이 있다. 오늘도 당신이 길 하나만 건너면, 거기에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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