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 그 사이 또는 그 차이_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1124호(개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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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 그 사이 또는 그 차이_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1124호(개강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4.02.2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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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사전적 의미로 구분하자면 ‘잘사는’ 것은 부유하게 사는 것, ‘잘 사는’ 것은 무사히,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잘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을 굳이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잘 살려면 (돈 걱정 없이)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의미와 맥락으로 따져볼 필요 없이, 우리는 잘사는 것이 잘 살기 위한 전제조건일 수 있지만, 잘산다고 모두 다 잘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냥 살면서 혹은 살면서 그냥 깨친다. 곽은미 감독의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은’ 박한영(이설 분)이라는 20대 탈북민 청년의 이야기다. 한영은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관광회사에서 중국인을 상대로 가이드를 하고 있다. 험한 시간을 거쳐 오면서 서울에 안착하기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았지만, 서울살이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한영에게도 녹록지 않다.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꿈은 계속 밀려난다.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 정미도 이제는 서울을 떠나겠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영은 서울이 낯선 외국인을 위해 시간과 여정을 설계하고, 안전한 여행을 이끄는 가이드 역할을 하지만 막상 자신의 삶과 시간은 가이드하지 못한다. 그녀는 여전히 어른거리는 길 위를 어슬렁대는 야생의 상태로 살고 있다. 아직 충분히 다 자라지 못한 것 같은데도 세상은 어른이라고, 홀로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고 등을 떠밀지만 여전히 세상이 어려운 숙제 같은 우리를 닮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잘살지도, 잘 살지도 못하는 한영을 통해 단단하게 서보려 하지만, 계속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우리 모습을 비춘다.

곽은미 감독은 내가 바라는 나의 삶과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국적이나 신분과 무관하게, 미래에 대해 고민할 시간 없이 당장을 살아내야 하는 오늘이 버거운 젊은이들의 상황을 묵묵하게 바라보며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곽은미 감독은 탈북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꾸미지만 사회적 문제로 맥락의 층위를 확장하지는 않는다. 미래가 불투명한 세상 속, 어쩌면 착취당하는 사회적 약자로 한영을 중심에 두지만, 영화는 그녀의 삶을 애처로워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산다는 것의 고단함과 밥벌이의 비루함은 늘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그 오랜 피로는 풀릴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 달라질 수 있다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생존하기 위해서 종종 거짓말을 하고, 뻔히 알면서도 잘못을 저지른다. 영화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정하고, 풀썩대며 부산스러운 청춘의 마음 읽는 온도는 따뜻하다. 하지만 씩씩한 한영의 삶이 곧 나아질 수 있으리란 거짓 위안을 주지는 않는다. 씩씩하다는 것이 희망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것을 앞서서 묵묵하게 인정하는 것 같다.

살아내려고 애를 쓰며 버둥대던 끝에 한영은 결국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나침반을 읽을 줄 모르는 길치처럼 화살표만 내려다보며 멈춰 선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숨이 가쁜 채로 서울을 떠나려는 한영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누군가에게 이 영화의 마지막은 서울살이를 끝내 이루지 못한 한영의 끝처럼 보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녀의 새로운 시작처럼 보일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서 한영의 이야기를 맺는 곳은 공항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들어오는 공항은 우리 삶의 어떤 순간을 닮았다. 떠나야 할지 돌아와야 할지 모른채 바닥을 질질 끄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매일 월컹대며 가다가 뚝 뚝 멈추는 우리 삶의 이정표를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 멈춰 섰다 생각하는 순간 어쩌면 나의 이야기는 끝났다고 무너지지만, 사실 우리의 진짜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다 보면 잘살기도 하고, 잘 살기도 하는 우리의 내일이 진짜 제시간에 잘 찾은 게이트처럼 열릴지도 모를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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