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제69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레벨 업!(소설 부문 가작) 〈1123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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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69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레벨 업!(소설 부문 가작) 〈1123호(종강호)〉
  • 이재윤 학생(상명대학교 경제금융학부)
  • 승인 2023.11.20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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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업!

 

주문자의 닉네임은 타락전사였다.

 

타락전사는 넥슨에서 메이플스토리의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200레벨 달성에 성공했다. 한 시간 동안 몬스터를 사냥해도 경험치가 0.01% 오를까 하는 시절이었다. 그는 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200레벨을 달성하겠다는 집념 하나로 매일 열 시간의 고행을 반복하는 초인이었다. RPG 게임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저 폐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나에겐 게임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우리를 더욱 놀랍게 했던 건 그의 정체가 드러난 후였다. 그는 피자집을 운영하는 오십삼 세의 평범한 아저씨였다. 미디어 앞에 나선 후 진행한 첫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은 노동입니다.

그 말은 달에 첫발을 딛은 암스트롱의 말보다 거대한 울림이 있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나는, 그 뒤로 게임을 할 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노동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더는 게임을 즐기지 못했지만, 하는 시간은 오히려 늘었다. 게임이라는 노동을 통해 그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십오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힘들기는 했어도 낭만이 있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상하차에도 낭만이 있다. 내 몸만 한 카트를 끌고 다니며 물류 창고를 돌아다녔다. 창고는 박스와 세제 냄새가 가득했다. 진짜 오늘이 마지막진짜 오늘이 마지막매일 되새겨도 인력에 끌려가는 달처럼 새벽 버스를 타게 됐다.

그만둘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해고됐다.

-이젠 너도 일을 해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는 부드럽게 권유했지만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너도 레벨 업할 시간이야. 덕분에 나는 쫓기듯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입금이 빠르고, 고용이 안정적인 직장. 고졸이 할 수 있는 일이면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일자리는 역시 물류센터뿐이었다. 메이플스토리로 치면 경험치를 쉽게 올릴 수 있는 사냥터였다. 돈을 익일 지급하고, 항상 직원 부족에 시달리기에 그만두기 전까지 잘릴 일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기에 나에게 고용 안정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그만두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일이 죽을 만큼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박스 냄새를 맡으며 물건을 집어오고, 바코드를 찍고, 통풍도 되지 않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땀이 흘렀다 마르기를 반복해 옷에 소금기가 생기기 일쑤였다. 따지고 보면 힘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왠지 포기해버릴 만큼의 피로는 느끼지 못했다. 땀에 전 채로 내일은 정말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쯤,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끌어쓰는 물류센터의 기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정신적인 문제가 컸다. 센터에 들어서면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피곤한 이곳에서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다는 것은 처음에는 장점이었지만, 나중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는 우주를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달에 혼자 남겨지면 이런 기분일까.

담당하는 일에 적응하는 데에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내 담당은 피킹이었다. 말 그대로 주문받은 물품을 골라 바코드를 찍고 포장 담당자들에게 넘겨주면 끝이었다. 일은 단순 반복이지만 물품이 다양했다. 주방 세제, 웰치스, 고양이 사료, 개 사료, 햄스터 톱밥.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북이 사료였다. 처음 거북이 사료를 날랐을 때는, 어쩐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깎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에 익숙해진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 10kg짜리 거북이 사료를 시킨 주인의 마음과 맛있게 먹을 거북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절로 훈훈해졌다. 점심에 나오는 아이스티 한잔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경지수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차분해진 마음으로 아이스티를 홀짝일 때면 나는 타락전사가 떠올랐다.

 

메이플스토리는 변화를 꾀했다. 기점은 빅뱅패치였다. 지나치게 높은 레벨 업 난이도와 관련해 불만을 표하는 게이머가 늘어나자, 넥슨은 정책을 바꿨다. 모토는 이랬다.

조금 더 쉽게. 조금 더 단순하게.

변화한 기조에 따라 레벨 업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다. 몬스터를 사냥해야만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전과 달리 퀘스트를 제시해, NPC의 퀘스트를 따라가기만 해도 레벨을 높이 올릴 수 있었다. 아이템도 다양해져 돈을 투자하면 그만큼 좋은 무기를 얻어, 사냥을 쉽게 할 수도 있었다.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이 혼재했지만 패치의 방향성에는 이견이 없었다. 언젠가 해야 할 패치였다는 게 중론이었다.

내가 메이플스토리에 재미를 붙인 건 그맘때였다. 항상 13레벨과 14레벨 사이를 헤매던 내게 빅뱅 패치 이후의 메이플은, 프로토버스 상태에서 대폭발을 맞은 우주와 같았다. 선택할 수 있는 직업도 다양해졌다. 전사, 도적, 궁수, 마법사 등의 단순한 직업에서 벗어나 다변화를 시도했다. 물론 다른 직업을 할 마음은 없었다. 언제나 전사를 택했다.

-전사가 되고 싶은 자 나에게로...

전사가 될 수 있는지 심사를 보는 NPC주먹펴고일어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사는 좋은 직업이 아니다. 무거운 무기를 들고 다니기에 속도가 느리고 공격 범위가 작다. 레벨 업이 쉬워졌다고는 해도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전사를 택한 이유는 오직 타락전사 때문이었다. 절망적인 사냥 속도를 보며 그 선택을 종종 후회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타락전사 김순욱 씨의 인터뷰를 찾아보곤 했다.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구요? 그 시간에 몬스터를 한 마리 더 사냥했으면 어땠을까요?

-노력 없이 쟁취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살핏한 마음으로 덤비면 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1955년생으로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견디며 살아온 그의 말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게이머라기보단 한 명의 구도자에 가까웠다. 피자집을 운영하며 두 명의 건장한 아들을 키워낸 애국자였고, 아들의 말에 귀 기울여 게임을 시작한 편견 없는 아버지였다. 또한 사스, 밀가루 파동, 웰빙 열풍 등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여 자신의 철학을 입증한 사업가기도 했다.2차 밀가루 파동을 견뎌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이건 제가 가장 잘하는 거지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 말입니다.

그는 진정한 전사였다. 나로서는 이런 거인과 같은 길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매일 아홉 시간씩 묵묵히 검을 휘두르며 언젠가 그와 같이 설 날을 꿈꿨다.

 

지금은 아홉 시간씩 바코드기를 휘두른다. 물류센터의 가장 큰 단점은 급여였다. 사람이 없는 사냥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최저시급이었고 주말 근무에도 주휴수당이 지급되지 않았다. 돈을 매일 지급해주는 탓에 모으기도 힘들었다. 나는 퇴근할 때마다 물류센터에도 빅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류센터와 대폭발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덜컹대는 버스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실장이 직원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2차 전직 같은 거였다. 월급도 오르고 잘 만하면 정규직으로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빨리 선택해. 자리 얼마 안 남았어.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귀 막고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실장의 말을 따라, 전직을 택했다. 박스와 세제로 가득한 물류창고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

 

소위 쿠팡맨이라 불리는 이 일은, 막상 센터에서의 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창고에서 하던 일을 트럭 타고 돌아다니며 하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21조로 팀을 꾸려 다녔다. 내 파트너는 십 년 차 쿠팡맨이었다. 이번엔 너구나, 애송이. 아저씨는 뉴비를 쩔해주는 올드비의 눈빛이었다.

아저씨는 카리스마 있었다. 운전하거나 물건 나를 때는 한없이 진지했고, 빠진 물건이 있는지 두세 번 철저히 검수했다. 그러다가도 농땡이 피울 시간을 주기도 했다. 트럭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해줬고, 그러면서 내 담배를 한 개비씩 빌리기도 했다. 운전할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실없는 농담을 건넸다. 농담이 그렇게 재밌진 않았지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근무의 질이 상승했다.

사람들은 정말 다양한 물건을 시켰다. 선풍기만 네 대 시킨 사람도 있었고, 겨우 우유 한 팩만 시킨 사람도 있었다. 우유 한 팩을 현관문 앞에 놔두기 위해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를 오층까지 올라가는 건 정말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대면의 시대가 된 덕에 벨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신분을 확인받고, 처음 보는 고객에게 감사 인사하는 일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 가지 견디기 어려운 것은 닉네임 시스템이었다. 개인정보보호라는 미명 하에 고객의 실명 대신 닉네임을 사용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고객이 스스로를 지칭할 때도, 우리가 고객을 부를 때도 그래야 했다. 직원교육 시간에 듣기로는 스타벅스의 닉네임 시스템에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 보는 고객을 닉네임으로 부르고 물건을 건네주는 건 낯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얼굴 볼 일이 없다는 게 다시 한번 다행으로 느껴지는 이유였다.

 

아저씨는 트럭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우리는 철저한 분담체계를 갖추고 있다. 아저씨는 목적지까지 운전하고, 나는 집 앞까지 배달했다. 불만은 없다. 다만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를 오르내리다 보면 뭔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너도 한 개비 줘?

나의 최종 전직이 과연 저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일단 담배를 받았다.

나는 아저씨가 마음에 들지만, 그게 꼭 닮고 싶은 사람을 의미하진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사수로서 장점이 많다. 우선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운전 실력이 대단했다. 옆에서 눈을 감으면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트럭이 거대한 우주 왕복선처럼 느껴졌다. 홀로 남겨진 줄 알았던 달에서 또 다른 표류자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조수, 다음 행선지는 어디지?

-상봉 스테이션입니다.

-그래, 삼십 분 정도 걸릴 테니 미리 잠 좀 자 놓으라고.

그런 상상을 하며 잠들곤 했다.

 

아저씨의 또 다른 장점은 목소리였다. 백색소음을 듣는 것처럼 나긋했다. 했던 이야기를 매일 하긴 했지만. 라디오를 틀어놨다고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주제는 다양했다.

도박, 파산, 불륜, 자살 기도.

이야기는 대부분 비극이었다.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좀 냉정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코 고는 버릇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코를 고는 척이었다. 아저씨가 관심 없는 이야기를 시작하면 소리 내어 코를 골았다. 처음에는 통했다. 코를 골면 아저씨도 이야기를 멈추었다. 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를 억지로 깨워서라도 이야기를 이어갔다. 짜증을 삭이면서 한편으로 그가 이곳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표류하고 있었을지 생각했다.

졸리다는 핑계로 나한테 이야기를 시키기도 했다. 나는 되는대로 주제를 꺼냈다. , 학교, 알바. 내 주제는 건전했다. 아저씨는 대부분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말이 통했던 주제는 게임이었다.

-나도 게임을 했었어.

메이플이 정식 서비스를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저씨가 했던 게임은 한국에서 서비스 종료했다. ‘바다 이야기라는 게임이라고 한다. 지금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아저씨 말로는 틀린 그림 찾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그 이상은 말해주지 않는다. 아저씨는 그 게임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돌린다. 그래도 종종 그때 생각이 나는지 회한에 젖어 혼잣말할 때도 있다.

-그때 본 바다가 얼마나 까맣던지.

아저씨는 바다 이야기때문에 바다에 뛰어든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어서 웃음을 흘렸지만, 아저씨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나는 바다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게임 이길래 사람을 바다에 뛰어들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아저씨가 바다에 뛰어든 건 날씨가 선선해지는 가을이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밤 중에 술을 마시고 파도를 보았다. 그리고 어쩐지 자신이 그곳에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가 발을 적시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한발씩 끌어당기는 느낌이었다. 해초가 살랑거리는 게 발밑으로 느껴졌고, 그 느낌이 너무 부드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을 쓰다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아저씨는 바다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마침내 머리를 제외한 몸 전체를 바다에 집어넣고 처음 한 생각은, 너무 차갑다는 것이었다. 이거 안 되겠는걸? 다음에 다시 와야겠군. 발을 다시 해변으로 옮기려는데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어어, 하는 사이에 점점 더 깊은 바다로 휩쓸려갔다. 몸을 감싸던 해초가 문득 자신이 못 빠져나가게 붙잡고 있는 듯했다. 아저씨는 그렇게 세 시간 가까이 조류에 휩쓸려 표류했다.

그때 아저씨가 잡고 있던 건 동그란 부표였다.

-그 부표는 얼마나 차갑던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코를 고는 척했다. 아저씨는 날 깨우지 않았다.

 

*

 

우리 구역은 노원과 도봉구였다. 멀면 강북구까지 갈 때도 있었다. 재수 없는 날은 그랬다. ‘보노보노맨에게 고양이 사료를 전달했고, ‘쾌걸근육맨 3에게 푸쉬업 바를 전달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5층 빌라에 사는 원숭이띠 미혼남에게 햇반 두 박스와 삼다수 한 팩을 전달했을 때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어쩐지 척박하고 외딴 행성에 생존 물품을 전달해주는 느낌이었다.

 

메이플스토리의 세계관도 메이플 월드라는 하나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메이플 월드에는 여러 대륙이 있고, 다양한 시대와 문화가 섞여 있다. 레고로 이루어진 나라도 있고, 아쿠아리움을 모티브로 한 해저도시도 있다.

빅뱅 패치는 많은 올드 게이머들을 떠나게 했지만, 동시에 더 많은 신규 게이머들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난이도가 쉬워진 만큼 문제도 있었다. 레벨 업이 쉬워져 초보자도 충분한 시간과 자금만 있다면 큰 노력 없이 200레벨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임의 최종 콘텐츠였던 200레벨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개발자들은 장고 끝에 최종 레벨을 250까지 올렸다. 20131월 말일의 일이었다.

최종 레벨이 올라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타락전사였다. 게임의 정점에 최초로 섰던 그는 하루아침에 도전자 신세가 됐다. 많은 게이머가 그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다. 김순욱 씨는 더 이상 미디어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화를 지켜봤던 게이머들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서버 곳곳에서 그의 목격담이 들렸고, 퀘스트는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사냥에만 몰두 중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비록 아이템은 최신 유행에 맞춰 바꿨지만, 여전히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에 게이머들은 존경을 표했다.

옆을 따라다니기만 하면서 돕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 상위 랭커들은 그를 앞서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레벨을 천천히 올리기도 했다. 거의 모든 게이머가 그의 일등 달성을 희망했다. 개발자들도 내심 그가 가장 먼저 250레벨에 도달하기를 원한 듯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도달한 게이머는 다른 이였다. 개발자들이 레벨 확장을 선언한 지 정확히 한 달 만의 일이었고, 당시 타락전사의 레벨은 고작 214였다. 그는 메이플스토리를 전문으로 하는 방송인이자 대형 유튜버였다. 월에 천만 원은 우습게 투자하는 자였다. 그는 경험치 두 배 쿠폰을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250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타락전사는 개인 사정상 게임이 불가능하여 도전을 멈추겠다고 선언했다. 게이머들은 그의 의견을 존중했지만, 마음 한편에 이유 모를 실망감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최초로 레벨 200을 달성한 타락전사입니다.

개발자 측에서는 상징성을 고려해 그의 모습을 박제해 페리온 전사의 전당에 전시했다. 그는 이제 주먹펴고일어서옆에서 지정된 대사만 읊는 NPC일 뿐이었지만, 올드 게이머들은 그렇게라도 추억을 되살리곤 했다.

 

그런 그의 닉네임을 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주문자: 타락전사, 주문 내역: 진라면 매운맛, 20 개입 1박스.

타락전사라는 닉네임은 흔한 편이다. 그가 내가 아는 타락전사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 내가 아는 타락전사는 라면을 한 박스씩 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라면을 좋아하긴 하지만, 구도자와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타락전사의 집 앞에 서자 확신으로 바뀌었다. 물류센터에서나 맡아본 퀴퀴한 냄새와 출처 모를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반지하였다. 꼭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김순욱 씨가 이런 데 살고 있을 리 없잖아. 그럼 그렇지. 냄새를 맡으며 어쩐지 안심되었다.

-타락전사 님. 안에 계십니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없는 척하는 건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다. 사실 우리도 대답이 없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고객이 대답할 시의 규정이 있긴 하지만, 마음에 없는 대화를 하는 게 피차 귀찮기 때문이다. 물품을 문 앞에 놓은 뒤 사진을 찍어 고객의 번호로 전송했다.

-고객님의 소중한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집 앞>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렇게 보냈다. 솔직히 행복하든 말든 관심 없지만.

트럭에 타기 전에 레쓰비 두 캔을 샀다. 아저씨는 고맙다고 말한 뒤 커피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조금씩 홀짝거렸다. 아저씨는 벌써 트럭에 타 있었다.

-가자.

아직 절반 넘게 남은 레쓰비에 담배를 담그고 트럭에 올라탔다.

 

두툼한 쿠팡 조끼 안으로는 덥다는 느낌뿐이었다. 트럭 에어컨이 고장나, 외부 온도를 그대로 느껴야 했다. 얼굴이 절로 화끈해지고, 물품을 쥔 전완근에는 타는 듯한 열기가 전해졌다. 센터에 있을 때보다 강렬하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렇지만 일을 하는 모든 순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품을 전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사를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일을 하면서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특히 고객들에게 물품을 전달할 때면 알 수 없는 전류 같은 게 느껴졌다. 그 감정은 어떨 땐 동정심이었고, 어떨 땐 호승심, 또 어떨 땐 측은지심이었다.

구곡동 로니콜먼에게 닭가슴살을, ‘민머리사냥꾼에게 미녹시딜을, ‘최순자님에게 박카스 두 박스를.

-열심히들 산다.

쭈쭈바를 빨며 지나가던 행인이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면 어쩐지 허망해진다. 이곳은 메이플 월드와 같다. 나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잘 팔리는 세상이다. 꼭 내가 닭가슴살과 웰치스와 박카스를 날라야 하는 이유는 없다. 물건을 옮길 때마다 퀘스트를 하나씩 처리하는 기분이다. 이 생각에 몰입할수록 누군가 게임 캐릭터를 키우듯 나의 인생 방향을 맘대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틈입했다.

-힘드니까 별 잡생각을 다 하는구나.

아저씨는 내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

 

비 오는 날씨는 배달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다. 장점이 있다면 창문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잠들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이런 날은 에어컨을 조금만 틀어도 차 안이 쾌적해져서 나쁘지 않다. 문제는 내가 배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우산도 없었다.

우리는 우산을 챙기기 위해 물류센터로 향했다. 하지만 센터에는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겨있었다. 실장에게 계속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인데.

아저씨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를 한참 긁적였다. 센터에는 사람이 없고, 실장은 전화도 안 받고, 비는 오고. 그냥 주차해놓고 배달을 내일로 미뤄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던 걸 해야지.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아저씨는 그렇게 답했다. 우리는 습관처럼 배달을 하기로 했다.

지존 멋쟁이에게 남성용 컬크림, ‘구곡동 피디에스 PC에게 24인치 모니터, ‘takealittletime’에게 러브젤.

모든 것은 나 혼자 날랐다. 한 손으로 물건을 드는 것은 규정 위반이기에 나는 비를 맞으며 고객님의 집 앞까지 걸어가야 했다. 혹시 도와줄까 싶어 아저씨 쪽을 쳐다봤지만, 아저씨는 코 고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숭이띠 미혼남의 웰치스 포도 맛 다섯 박스와 가정용 정수기에는 아저씨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원숭이띠 미혼남도 드디어 정수기를 사는구나, 하는 후련한 정취와 동시에 웰치스 다섯 박스 정도면 물 대신 마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그도 자신만의 퀘스트를 깨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먼저 정수기를 아저씨와 동시에 나른 후에 다시 내려와 웰치스를 날랐다. 정수기는 무거웠고, 웰치스는 더 무거웠다. 땀이 비와 섞여 옷은 물론, 얼굴과 목, , 등까지 전부 젖어 있었다. 모습이 얼마나 추레했는지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간신히 배달을 마친 후,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려 트럭 안까지 뛰어들어갔다.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지?

아저씨가 비에 젖어 무거워진 유니폼을 허리춤까지 내리고 말했다. 옷 안까지 들어가 있던 물이 미끄럼틀 타듯 내려왔다. 나도 옷을 벗어 던지며 대답했다.

-결국 주먹펴고일어서의 정신 아닐까요?

-그거 맞는 말이구나.

아저씨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대답했다. 트럭 안에 담배 연기와 냄새가 퍼졌다.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충분히 니코틴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저씨는 연기를 창문 밖으로 날린 후, 감상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차창에 떨어지는 비를 지켜봤다. 트럭 안이 잠시 평화롭게 느껴졌다. 드디어 우주 정거장 어딘가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배달 같은 건 잠시 뒤로 미루고 이대로 한숨 자고 싶었다.

-내가 게임을 했을 때는 말이야

나는 코 고는 척을 했고 아저씨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도 가본 곳이었다.

-주문자: 타락전사, 주문 내역: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

하루에 라면을 얼마나 먹기에 벌써 재주문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다시 그 음산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에도 이랬나? 구름이 햇빛을 가려 지금이 몇 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비는 점점 몸집을 불려 굵은 알맹이처럼 떨어졌다. 어느새 도로가 물에 잠겨 트럭이 속도를 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타락전사의 집은 여전히 어두운 기운이 감돌았다. 집 근처로 갈수록 비 때문에 퀴퀴한 냄새가 심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그저 느낌이 아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소방차가 트럭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반지하에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집 안에 호스가 연결되어 물을 역류시켜 뿜어내었다. 하수도가 터진 건지 비릿하고 찝찝한 냄새가 가득했다. 창문을 꽉 닫고 있어도 트럭 안으로 새어들었다. 반지하에 물이 어지간히 찼는지 집에 들어갔다 나온 소방관은 허리춤까지 젖어 있을 정도였다. 막내 조로 보이는 소방관들이 양동이로 열심히 물을 퍼 날랐고, 선임은 그 옆에서 젖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가만히 그 사투의 현장을 지켜만 보았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린 쿠팡맨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업마다 주어진 퀘스트는 다르다. 메이플과 현실 세계의 공통점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에게도 퀘스트가 있었다.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

어떻게 전달할지가 문제였다. 타락전사가 집에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빌라 앞에 두고 가면 박스가 비에 젖어 민원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본사의 허락 없이 배달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경비실에 물건을 맡기고, 문자를 남겨놓기로 했다. 고객의 요청 없이 물건을 경비실에 맡기는 건 규정 위반이지만, 아무렴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퀘스트를 주는 사람은 퀘스트 깨는 게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지 모른다.

-고객님의 소ᅟᅮᆼ한 <진라면 매운맛 20개입 1박스>가 안하게 <경비실>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도 행한 하루 되세요.

물기 때문에 터치가 제대로 먹지 않았다. 덕분에 타자를 제대로 칠 수 없었다. 오타를 고치려다 그냥 전송버튼을 눌렀다. 행복하든 말든.

문자를 보내놓고 물건을 트럭에서 꺼냈다. 떨어지는 빗방울로부터 진라면을 지키기 위해 나는 박스 위로 쿠팡 옷을 덮은 채로 경비실까지 달렸다. 경비실을 향해 달리는 와중에 누가 내 손목을 잡았다. 우비를 쓰고 있었고, 물을 퍼다가 나왔는지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진라면?

모자 때문에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얼핏 어릴 적 기사에서 봤던 사진 속 김순욱 씨와 동년배처럼 보였다. 다만 어딘지 낡고, 지치고, 심지어는 조잡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다.

-타락전사님 맞나요?

긴장됐다. 솔직히 조금 절박하기까지 했다.

-맞는데요.

그는 진라면을 내 손에서 낚아채 가려 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도무지 진라면을 건넬 수가 없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불가항력이 내 몸쪽으로 박스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남자도 진라면을 자신의 몸쪽으로 당겼다. 나는 뺏기지 않으려 힘을 줬다. 남자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날씨도 나쁘고, 비도 오고,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고, 그래서 그가 김순욱 씨가 맞는지 아닌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 표정을 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피자집 사장은, 구도자는, 전사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그는 박스를 쟁취하려 몸을 나에게 바싹 붙였다. 그의 몸에서 하수도 냄새가 올라왔다.

-그만하고 가자.

트럭에서 언제 나왔는지 아저씨가 박스를 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남자는 박스를 내게서 뺏은 후, 나를 한참이나 노려봤다. 그러고는 다시 양동이와 박스를 들고 반지하로 유유히 사라졌다.

 

아저씨와 나는 비를 잔뜩 맞은 채 트럭 안으로 들어와 손을 녹였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알맹이처럼 떨어지는 비를 뚫고 도로만 달렸다. 나는 눈썹까지 비에 젖어, 눈을 반쯤 강제로 감고 있어야 했다. 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도 젖었지만, 나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우리는 비에 젖은 탓인지, 다른 무언가에 젖은 탓인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조용히 달리기만 했다.

먼저 적막을 깬 건 아저씨였다.

-전화해봤는데 오늘 폭우 때문에 다들 조기 퇴근했대.

비를 맞아 불은 몸이 배로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일을 마친 퇴근길이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원래라면 트럭을 센터에 주차해야 했지만, 센터는 이미 닫혀있을 것이었다. 오늘이 조기퇴근의 날이라는 걸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 나는 여전히 표류 중인 게 분명했다.

한참을 달리던 트럭 안에서 몸이 말라갈 때 즈음 비린내가 느껴졌다. 하수도 냄새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비릿한 느낌이었다. 냄새의 근원을 찾아 이리저리 킁킁거렸다. 코를 돌릴 때마다 냄새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코가 멈춘 곳은 아저씨의 어깨였다. 바닷가에서나 맡아볼 법한 해초 비린내였다.

-바다 이야기할 때 몸에 뱄나 봐.

아저씨는 머쓱하게 목 뒤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도 덩달아 머쓱해져 코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아저씨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나도 따라 웃어야 하나 했지만,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아저씨는 다시금 운전에 집중했다. 궁금하긴 하다. 그날 밤, 바다에선 무슨 이야기가 있었을까?

-조금 자.

나는 축축하게 젖은 몸과 머리를 조수석 의자에 빠짝 당기고 눈을 감았다. 아저씨는 웬일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글쎄.

아저씨의 해초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고, 내 몸까지 엉겨 붙어 없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다.

바다, 부표, 행성.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메이플 월드의 해저도시 이름은 아쿠아 로드다. 그곳은 어인과 각종 괴물, 그리고 인간들이 사는 도시다. 100~130 레벨의 몬스터 들이 서식하고 있는 장소로, 초보자는 쉽게 발을 들이기도 어려운 곳이다. 물속에서 숨을 쉬게 해주는 장비를 구매하지 않으면 체력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든 캐릭터는 체력이 0이 되면 죽는다. 그리고 경험치와 아이템을 잃어버린다. 부활 주문서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경험치와 아이템을 유지한 채 죽은 자리에서 바로 살아난다.

나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아저씨를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아저씨가 표류했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아저씨가 어떻게 구조됐는지 잘은 모르지만, 조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메이플 월드가 아니고, 부활 주문서 같은 건 없으니까.

우리는 쌍문역 근처에서 헤어졌다. 아저씨는 집까지 태워준다 했지만 나는 좀 걷고 싶었다. 비는 어느새 그쳐, 맑고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핸드폰을 보니 오만 원 입금 알림과 실장의 뒤늦은 문자가 와있었다.

-미안~ 핸드폰을 이제 봤네. 우리가 다 전달했는데 그쪽 팀에는 전달이 안 됐나 봐~ 그걸로 어머니랑 맛있는 거 사 먹고 내일은 쉬어~

뭐라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보내지 않았다. 실장은 내가 행복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가 레벨 업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낡고 조잡해지는 게 레벨 업이라면 뭔가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우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이불을 귀까지 덮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부유하고 있는 거라면 이곳은 우주일까, 바다일까. 헷갈렸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생각하는 대신, 부표를 떠올렸다. 우주에도 부표가 있을까? 아저씨가 표류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눈을 꾹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이 침대 밑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느낌에 집중했다.

 

〈2023 제69주년 명대신문 소설 부문 가작 수상소감〉

이재윤 학생(상명대학교 경제금융학부)
이재윤 학생(상명대학교 경제금융학부)

백마문화상에 지원한 게 벌써 세 번째인 것 같은데, 드디어 결실을 얻은 것 같아서 행복합니다. 4학년이 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방학에는 토익도 공부했고, 지금은 졸업 준비와 동시에 취업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맨날 그렇게 지내는 건 아니고, 쉴 때는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합니다. 저에게 소설 쓰기는 일과 휴식의 중간 정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떨 땐 너무 귀찮고 힘들지만, 어떨 땐 즐겁습니다. 친구들한테 왜 소설 쓰냐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쑥스러워서 제대로 답을 못했습니다.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냥 재밌어서입니다. 평생 소설만 쓰면서 놀고먹고 싶습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 현타가 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걸 알고 있고, 지금 당장 우울해도 결국 행복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소설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게임 닉네임은 '행복전도사재윤'입니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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