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제69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Zombie(시 부문 당선작) 〈1123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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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69주년 명대신문 백마문화상 – Zombie(시 부문 당선작) 〈1123호(종강호)〉
  • 김민경 학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승인 2023.11.20 14: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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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mbie

 

센서등이 없는 비상구를 오른다 맨발에 누군가의 장기들이 밟힌다 미끄럽고 질퍽해 게다가 징그럽고, 생각하는 순간 엎어진다 고개를 들자 뚝 뚝 떨어지는 핏물들

 

양떼 같은 몸들이 기계적으로 계단을 오른다 깡통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다 간헐적으로 서로에게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사람은 아니에요, 눈알이 뽑힌 여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한다

 

언제부턴가 걷고 있었어요 출근을 했던 것도 같은데, 고개를 기울이는 남자의 귀에서 달팽이관이 흘러내린다 완전히 빠져나온 귓속 부속물들이 계단을 타고 미끄러진다 여긴어떻게오신거예요! 소리쳐도 남자는 대답이 없고, 뒤에서 머리가 터진 학생이 입을 연다

 

밤새 수학 문제를 풀었어요 의자 뒤에는 익숙한 얼굴의 몽둥이가 앉아 있었고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았죠 두 시간씩 숨을 참다가 화장실에 가면 빈 욕조에 들어가 누웠어요 차오르는 욕조에서 쪽잠을 자다 보면 부서질 듯한 노크 소리, 젖은 얼굴을 닦고 나오면 무자비하게 따귀를

 

맞았어요
말하는 입술에서 침이 줄줄 흐른다
손이 없는 남자가 박수 대신 구둣발을 구른다

 

이 위에는 무엇이 있나요
미래가 있대요
그게 뭔데요
유엔빌리지 첼리투스 트리마제

 

일단 걸읍시다

 

텅 빈 이마에 손을 올리자 힘이 풀린 뇌가 우르르 쏟아진다 손 안 가득 대뇌 소뇌 뇌들보 뇌궁체, 고개를 들면 사람 같은 눈들이 따라붙는다 원래 처음에는 다들 모르더군요, 가슴이 터진 여자가 덜렁거리는 혈관을 뜯어내며 말한다

 

다시 걸읍시다

 

꼭대기를 향한 대이동이 시작된다 어디선가 비명 같은 함성이 쏟아진다 더 가! 더 올라가! 씨발 그냥 미친 듯이 뛰란 말이야! 유엔빌리지첼리투스트리마제, 나는 프로야구 홈경기처럼 응원받는다 걷고 걷고 걷고 걷는다 이유를 모른 채 엔딩크레딧처럼 박수를 받으며

 

터벅 터벅 터벅
열심히 망가진다

 

〈2023 제69주년 명대신문 시 부문 당선작 수상소감〉

김민경 학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민경 학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계단을 오르는 일은 늘 힘이 듭니다. 호기롭게 시작하여도 숨이 차고, 무릎이 저려오고, 등줄기가 화끈해지는 느낌이 들면 멈추고 싶어집니다. 오를수록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나중엔 뒤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멈추지 못하고 걷습니다. 그 모양이 참으로 삶과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시의 화자들은 자꾸만 어딘가를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화도 내고 슬퍼도 합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습니다. 화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그들과 함께하는 동반자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제가 원하는 시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합니다.

기꺼이 읽어 주시고 소중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비로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 기분입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있어 주는 모든 이들에게도 제 마음을 전합니다. 저조차 저를 견디기 어려울 때 늘 곁에서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사랑이라 굳게 믿습니다.

비로소 계단 끝의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그림일기를 쓰고 잠에 들어야겠습니다.

 

〈2023 제69주년 명대신문 시 부문 심사평〉

남진우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남진우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상수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상수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여기 좀비떼가 걸어간다

가을의 초입, 2023년 백마문화상 시부분 심사위원들은 응모된 작품을 2~3주에 걸쳐 나눠 읽고, 총 아홉편의 작품을 본심에 올린 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가작으로 선정한 「북회귀선」 외 2편의 경우,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문장을 유려하게 구사할 줄 아는 응모자의 능력이 돋보였다. “내가 숨어 사는 곳/어디에도 진짜 같은/이야기가 없어서/신을 믿기도 했다”(「북회귀선」)라든지, “고양이와 아기 울음소리를 구별 못해/사랑이란 것을 자주 빼앗기곤 한다”(「이심률과 도덕성」)와 같은 문장은 쉽게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진지한 고뇌들이 내면에서 치열하게 불타올랐다가 천천히 숙성된 뒤, 시를 쓰면서 문장 곳곳에 자연스럽게 배어나고 있었다. 개별 문장들의 서글픈 아름다움이 서로 조응하여 완결성 있는 주제로 조금만 더 치밀하게 묶인다면 한결 묵직한 파괴력이 생길 것 같은 인상적인 작품들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당선작으로 「Zombie」 외 2편을 골랐다. 「Zombie」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작품이다. 영화나 드라마, 장르물과 웹소설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좀비’라는 테마 자체야 이젠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걸 시로 형상화하는 일은 또 다르다. 눈알이 뽑힌 여자, 달팽이관이 흘러내리는 남자, 머리가 터진 학생으로 대표되는 인간 좀비들이 비명 같은 함성에 취해 삐걱
이며 걸어간다. “유엔빌리지 첼리투스 트리마제” 등 소위 성공한 삶을 상징하는 고급 빌라 혹은 아파트를 향해 자기 몸이 다 망가져 흘러내리는 줄도 모른 채 떼를 지어 걸어가는 이 장면에서 자유로운 자는 누구인가. 삶의 진정한 가치 따위는 배부른 소리일 뿐, 오직 즉자적인 생존과 물질적 성공을 위해 어떠한 자의식이나 성찰도 없이 무조건 전진하는, 혹은 전진하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비극과 욕망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솜씨가 발군인 작품이었다. 신체 훼손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구사하는 능력, 좀비 테마를 공간적으로 구조화하는 능력, 시적 긴장감을 유지한 문장과 현장감 넘치는 적절한 서사의 리듬감 또한 설득력을 높이는 힘이었다.

오랜만에 압도적인 시를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마음을 다해 축하와 격려를 보낸다. 이외에 「경계」외 2편, 「블루펭귄의 로맨스」외 2편, 「월요일」 외 2편을 응모한 세 사람 역시 선명한 인상을 남겼음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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