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버린 후에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_ 영화 〈다가오는 것들〉 〈1123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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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버린 후에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_ 영화 〈다가오는 것들〉 〈1123호(종강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3.11.20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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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제 마음 하나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을 때가 많다. 무료할 정도로 평화로운 봄날의 오후처럼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싶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나 태풍, 지진, 때 이른 폭설 마냥 삶에는 불쑥 예상치 못한 위기 또는 변화가 다가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소한 것들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진다. 반면에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실감이 커지는 경우도 있다. 삶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 해도 알 수 없는데, 원하지 않는 순간 불쑥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기도 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은 상실을 통과하는 순간에 불쑥 다가오는 희망의 한 덩이처럼 인생에 다가오는 것들과 떠나보내는 것들, 그 일상의 모습을 통해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영화다. 파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는 선생님이라는 직업, 두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병든 홀어머니의 딸이라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큰 변화 없는 잔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기가 막히게도 그녀의 평온한 일상에 커다란 구멍이 연이어 생기기 시작한다.

사실 도저히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삶이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어떤 점에서 영화 속 나탈리가 겪는 소동은 우리의 삶과 닮았다.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은 인생의 어떤 것들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계속 소멸되고,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소리 없이 나타나 내 삶의 곁에 똬리를 틀고 앉는다. 그런데 희한하다. 사실 땅 꺼질 듯 한숨 쉬어도, 땅은 안 꺼진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하늘은 안 무너진다. 당장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정작 죽지는 않는다.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실상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불행은 정신없이 몰려온다. 남편도, 일도, 제자도 모두 마음을 돌리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꽉 차 있던 책장에서 누군가 무작정 책을 빼버린 것처럼 나탈리의 인생이라는 책장에 듬성듬성 구멍이 난다. 미아 한센-러브 감독의 영화 〈다가오는 것들〉은 성취와 상실, 탄생과 소멸, 사랑과 증오 등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종이의 앞뒷면처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쩌면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항상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힘주지 않고 덤덤하게 말한다. 제목과 달리 줄곧 떠나가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역설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배신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끼지만 나탈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 함께 무너지지 않고, 공백이 생긴 자리에 그대로 앉아 떠나간 자리를 다른 것들로 채우면서 살아간다. 텅 빈 책장처럼 인생에 커다란 빈틈이 생겼다 생각하지만, 소소하고 건강한 것들이 다가온다. 실제로 우리 삶을 채우는 것들은 거대한 것들이 아니라 아주 작고 소소한 책 같은 것들이다. 보내야 할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고, 다가오는 것들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잘 떠나보낼 필요가 있다. 곁에 두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떠나보내면서 나탈리는 인생의 여러 선택들 속에서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충분한 시간을 자신에게 허락한다. 그러다 보니 텅 빈 것 같던 내 일상의 책장이 다시 내가 선택한 책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결국 나탈리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선택도 타인의 마음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음을 뒤흔드는 격랑은 오직 본인만이 오롯이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탈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카메라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에 머물면서 그녀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다가가지 않는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이라 잘 알지 못한다. 눅진눅진하게 마음에 눌어붙어 있는 후회를 놓아줄 수 있다면, 인생이라는 무게에 비해 해법은 의외로 가벼울지도 모른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마음의 주인이 되어 굽이굽이 접힌 마음을 따라 한번 걸어보아야 한다. 어쩌면 마음에 접힌 주름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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