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간첩이 된 천재 이방인 〈1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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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간첩이 된 천재 이방인 〈1122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11.06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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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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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7월 3일, 깜짝 놀랄만한 보도가 하나 나왔다. 국내 최고의 이슬람문화 연구 권위자로 알려진 레바논계 필리핀인 ‘무함마드 깐수’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뉴스를 믿지 못했다. 어제까지 텔레비전에 나오던 친근한 외국인 교수가 간첩이라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수사 결과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깐수는 북한에서 학자로 위장해 남한으로 파견한 고정간첩이었으며, 더구나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본명은 ‘정수일’이었다.

중국과 필리핀, 레바논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온 깐수의 남파 경로는 지난하고 복잡했다. 그런데도 그가 한국으로 입국한 뒤 실제로 고정간첩으로 10년 넘게 활동하며 올린 실적이란 것은 별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가 북으로 송신한 남한 관련 첩보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소식을 갈무리한 것에 불과했다. 어느 때는 그저 자신이 연구하던 학술자료를 정리해 보내기도 했다. 그는 실상 간첩보다 학자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2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언어 능력이나 학문적 업적을 따져보면,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깐수는 ‘타고난 천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남북의 체제 경쟁과 정치적 대립도 그의 학구열을 소진시키지 못했다. 자신을 환대해 주는 것은 물론 점차 익숙해져 애착이 생기는 남한에서 생활하며 남몰래 이적 행위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랜 번민과 고뇌가 이어졌으나, 그렇다고 자신을 믿고 간첩으로 파견한 조국 북한을 배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신분을 위장한 채, 한국에서 이도 저도 아닌 간첩이자 학자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무함마드 깐수 간첩 사건은 냉전시대 분단 조국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간첩이란 무엇이었나를 새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간첩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처럼 멋지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간첩은 언제 정체가 탄로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생활의 핍진함을 견뎌내며, 밑도 끝도 없는 ‘밀고’와 ‘접선’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고달픈 존재였다.

그들은 언제고 자신의 신세가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걱정과 긴장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더구나 간첩임이 발각되는 순간 자살하도록 훈련받아, 독극물을 상비한 채 지낼 정도로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기도 했다. 간첩은 냉전시대 체제 경쟁에 내몰린 국가에 의해 가장 모욕적으로 다뤄진 ‘비(非)인간화된 인간의 전형’이었다.

1996년에 깐수가 간첩으로 적발된 사정도 그 내막을 살펴보면 복잡한 구석이 있다. 1994년 여름 북한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아들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도 부자간의 권력 세습을 두고 엄청난 암투와 갈등이 벌어졌다. 남북 대결보다 내부 단속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남파한 간첩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공작금이 끊기는 등 지원이 중단됐다.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했던 북한 정권이 남한 첩보 임무를 중요하게 취급할 리 없었다.

조국 북한의 지원과 보호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니, 남한에 파견된 간첩들도 각자도생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한으로 파견한 간첩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간첩에 대해서는 우리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쉽게 말해 간첩 깐수는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냉정하게 버려진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냉전시대 활동했던 간첩들에게 예정된 운명이었고, 피할 수 없는 미래였다.

간첩은 남한과 북한 양측 모두에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실체를 드러낼 수 없었으나, 현실에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냉전시대 간첩은 언제 어디에서나 비가시적인 형태로 머물기를 강요당하는 흐릿한 그림자였다. 더구나 고정간첩이라는 직책은 현지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가며 막을 수 없는 세월의 더께를 받아들여야 했고, 생활의 무상함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이기도 했다.

정수일은 20세기 초 만주에서 태어난 조선인으로서, 중국과 북한, 남한을 넘나들고 중동과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관통해 낸 ‘식민’과 ‘분단’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냉전시대 북한에 의해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활용된 엘리트 간첩인 동시에, 남한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 하는 고단한 이방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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