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훈의 씨니컬] 괜찮아진다는 거짓말과 달콤한 폭력 사이_영화 〈지옥만세〉 〈1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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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의 씨니컬] 괜찮아진다는 거짓말과 달콤한 폭력 사이_영화 〈지옥만세〉 〈1120호〉
  •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 승인 2023.09.2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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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최재훈 칼럼니스트/영화평론가

어린 시절, 생각해 보면 억울한 일들이 참 많았다. 어른들은 다 지나간다고, 한 때라고, 성숙해질 거라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게 시간은 끝이 보이는 터널이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이다. 한 발도 나아갈 것 같지 않은 답답한 시간은 뚝 끊어진 다리처럼 멈춰버린 것 같다. 뾰족해진 마음은 가시가 되어 누군가를 해치거나, 나를 다치게 한다. 어려서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어린 날의 아이들은 칼날처럼 날이 섰고 잘못 묶은 매듭처럼 점점 꼬여간다. 아등바등 꾸역꾸역 살아가는 시간 속 지독하게 애쓰는 나를 보고 있자면 문득 나는 지금, 이곳, 여기에서 지옥의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임오정 감독의 〈지옥만세〉는 현실이라는 지옥에 사는 소녀들을 통해 우리가 믿음이라 말하는 진짜 거짓말, 끝내 상처를 남기고야 마는 그 폭력을 두 눈 부릅뜨고 들여다보는 영화다. 가해의 이유를 들여다보거나 피해자의 편을 드는 법도 없이, 그냥 소녀들의 현재를 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인 나미(오우리 분)와 선우(방효린 분)는, 가해자 채린(정이주 분)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스크래치가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로 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채린은 맑은 얼굴로 피해자들을 자신의 구원이라 부르고, 나미와 선우는 가해자가 되어 조금이나마 복수하고 싶어서 위악을 떤다.

학교 폭력에서 시작해서 사이비 종교로 배경을 옮겨가는 사이, 영화 〈지옥만세〉는 자기 삶이 지옥이라 생각하는 소녀들을 낙원을 도모하지만 신성하지 않은 거짓 집단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어떤 삶이 더 지옥인지를 묻는다. 아직 어린 소녀들은 자기 자신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어 누군가를 쉽게 도울 수가 없다. 친구라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친구에서 적으로 손쉽게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계속 마음과 가장 다른 표정을 지어 보인다. 복수와 구원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동 속에서 소녀들은 필사적으로 진심과 가장 다른 표정을 서로에게 보여주면서 진짜 마음을 숨긴다.

영화 속에는 낙원을 갈구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가 등장한다. 마음의 흉터가 표정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누군가 쓱 내미는 손에 의지하게 된다. 하늘보다 땅에 가까운 그들과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신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하늘이 되어있다. 바스락대는 삶에 쓸려 생채기가 난 곳을 어루만져 준 사람, 그는 어느새 나의 신이 되어 있다. 구원이라는 환상을 통해 채린은 지옥 같은 현실이 지옥이어도 상관이 없는 더 지독한 지옥에 빠진 사람이 되어 있다. 학교 폭력의 이야기인가 싶으면, 영화는 금세 표정을 바꿔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사람들의 너덜너덜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결국 〈지옥만세〉는 지옥 같은 현실 밖 세상은 여전히 지독한 지옥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자신을 망치지만, 허망한 믿음에 빠진 사람들은 그 민낯을 보고서도 쉽게 마음을 돌리지 못한다. 임오정 감독은 믿음이 구원이 아니라 출구 없는 폭력이 되어 하나의 거대한 지옥을 만드는 현실을 뒤섞어 보여준다. 현혹되는 유약함과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지함을 악행이라 비난하는 대신, 그 또한 그들의 삶이라고 말하는 이야기가 냉정하지는 않지만 물기가 없이 건조해서 까끌거린다.

소녀들의 성장영화라는 뻔한 이야기로 거짓 위안을 주지 않는다. 달아났지만 채린에게 구원은 없었고, 나미와 선우가 되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지옥이다. 하지만 긴 어둠을 끝내는 법을 깨치지 못한 채로 꿈틀거려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소녀들의 우정이 우물쭈물하다 끝나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해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죽고 싶다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죽겠네, 로 입장을 바꾼 소녀들처럼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봐도 괜찮다 싶다. 뭐 같은 세상, 우리가 망가지는 대신, 세상이 망해버려야 한다고 소리치는 게 낫다. 어쩌면 우리의 지옥이 당신의 천국보다 조금 더 나은 건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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