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은 애매한 색이다.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흑백 사이 어딘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뿐일까? 예로부터 회색은 박쥐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상황에 따라 처신을 바꾸는 기회주의자를 뜻하는 말로 ‘회색분자’가 있다. ‘소속, 정치적 노선, 사상적 경향 따위가 뚜렷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국어사전은 정의한다. 지금까지도 이 말은 정당과 단체, 정치세력에서 적대적인 뜻으로 사용 하고 있다.
우리는 왜 회색을 미워할까? 나는 분단의 결과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전쟁을 포함해 극한의 경쟁 속에서 상이한 두 체제가 끝없이 서로를 적대한다. 한국전쟁을 다룬 매체에서는 민간인 학살의 뼈아픈 모습이 등장한다. 전쟁 중 민간인은 제네바 협약 4협약4조에 의거, 보호의 대상이다. 하지만 국군과 인민군, 미군은 ‘적대세력을 도울 가능성’만 보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흑백 중 어디에 가깝든 회색이면 이 분단의 땅에서는 ‘죽을 놈’ 취급이다.
내가 참 싫어하는 신조어가 있다. 1찍, 2찍이라는 멸칭이다. 한계가 뚜렷한 한국의 선거제도 하에서 선택한 후보나 정당은 투표자의 전부를 포괄한다고 보기 어렵다. 헌 데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서로를 향한 조롱 과 냉소가 이어진다. 회색의 자리에서 합리 적 의견을 도출하려 해도 소용없다. 1찍만, 또는 2찍만 남기면 이 나라가 건강해질까?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우리에겐 안전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난감함을 솔직하게 공유하는 절충의 회색 테이블이 필요하다. 구성원 모두에게 동일한 발언권과 의사결정권을 제공하는 민주주의의 공간! 정당, 지역, 배경, 이념 지향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공간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새 창조가 시작될 것을 믿는다. 엄혹한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인 이들은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세부 노선은 달라도 ‘독재 타도’라는 목표를 공유하고 회색 테이블에 모여 새 나라의 청사진을 그려냈다. 그런 공간을 조한혜정 교수는 ‘창조적 공공영역’이라 불렀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적대의 정치가 너무 깊게 침투했다. 우리는 분단에서 기인한 민간인 학살과 지금의 적대적 정치의 매커니즘이 다르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명지대학교, 지역사회 모두가 마주한 녹록지 않은 현실을 풀어내려면 검은색도 흰색도 모두 모여야 한다. 먼지 쌓인 회색의 테이블을 닦고 공론의 차를 끓이자. 저 거대한 대통령실과 국회가 아니라 흑백 이 머리를 맞대는 회색 테이블이야말로 이 나라와 공동체를 살리는 첫 벽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