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아무도 모른다 〈1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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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의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 아무도 모른다 〈1119호〉
  • 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 승인 2023.09.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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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부원 인문학협동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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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월 31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정병섭 군은 만화 <철인 삼국지>에 푹 빠져 있었다. 이 만화는 삼국지의 등장인물을 로봇으로 바꾼 일종의 과학 역사 만화였다. 몇 번을 반복해 보았는지 대사까지 줄줄 욀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장비’였다. 만화에는 마침 로봇으로 설정된 ‘장비’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병섭 군은 자신도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을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친누나에게 자신이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스스로 목을 조른 정병섭 군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불량만화가 사람을 죽였다고 난리를 쳤다. 당장 신문과 방송에서 학생들이 불량만화에 빠져 학업을 소홀히 하고 나쁜 생각에 물든다고 비난했다.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불량만화를 모두 없애야 한다며 만화에 적대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사회 전방위로 불량만화 추방 캠페인이 벌어졌다. 각 지역에 있던 만화방은 날벼락을 맞았다. 경찰이 들이닥쳐 불량만화를 압수한다는 빌미로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 어떤 만화가 해롭고 어떤 것이 괜찮은지에 대한 기준이 마련돼 있지 않아, 경찰은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만화책을 몽땅 거둬들였다.

수만 권의 만화책을 보란 듯이 여의도 광장과 광화문 앞에 산처럼 쌓아두고 모두 불태웠다. 현대판 분서갱유가 따로 없었다. 정병섭 군 사망 사건에 만화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린 성급한 조치였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은 정부의 만화 압수 및 소각 조치를 대체로 수긍하며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1970~80년대에는 어린이날만 되면 불량만화를 그러모아 불태우는 일종의 퍼포먼스가 정기적으로 실시됐다. ‘만화책 불태우기’는 보여주기식 교육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정병섭 군 자살 사건은 만화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가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된 출발점이었다. 만화는 저급하고 불량한 취미이자, 사회적으로나 교육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몹쓸 문화로 평가받았다. 소위 말하는 저질의 하위문화로 취급해 만화를 창작하거나 즐기는 것 모두 건전하지 못한 행위로 간주했다. 만화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상력이나 창의성과 같은 긍정적 측면은 철저하게 무시했고, 만화가 품고 있는 재미와 오락의 요소마저 무차별적으로 배척했다. 이후 사람들은 만화가 매개할 수 있는 숱한 문화적 가능성과 창조적 에너지를 소진시키는데 주저함이 없게 됐다.

만화를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문화콘텐츠의 장르 간 위계를 설정하는 고질적인 병폐로 자리 잡아 오랫동안 관습처럼 남아 있었다. 건강한 취미와 고상하고 우아한 독서 활동은 따로 있고, 질 낮고 불건전한 만화 읽기 취미는 억제돼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만화와 더불어 게임이나 오락 같은 취미와 여가 활동 역시 덩달아 박한 평가를 받게 됐다. 오늘날 만화 혹은 게임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K-문화 콘텐츠의 핵심이자 첨병으로 대접받는데,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한 수모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정병섭 군이 죽게 된 이유는 오직 만화 때문이었을까? 불량만화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정병섭 군이 처했던 열악한 가정환경이나 말 못 할 고민에 대해 깊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실직 상태였고, 형편이 넉넉지 않아 정병섭 군은 종종 배고픔을 겪기도 했다. 어린 아이라고 말 못할 상념이 없을 리 없다. 마음이 여려 유독 상처와 아픔이 많았던 초등학교 6학년 사춘기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만화를 모방한 자살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 모든 정황과 사실을 간단히 외면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존재의 내밀한 사정은 누구도 그 이유와 원인의 전부를 알 수 없다. 단순히 만화를 모방해 죽었다는 즉흥적인 판단은 한 인간이 내린 최후의 선택에 대한 완전한 오해이자 모독일 수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과 정신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 당시 우리 사회가 청소년의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은 그만큼 편협하고 일차원적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고의적인 오독은 특정 사회문제를 일거에 해소하려는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연결돼 있는지도 모른다. 정병섭 군 자살과 불량만화 압수 및 추방 운동은 하나의 해결책이 제시되면 일사불란하게 따라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과도했던 시대의 어처구니 없는 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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