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한국이야! 〈1103호(종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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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한국이야! 〈1103호(종강호)〉
  • 강명훈 정치외교학과 교수
  • 승인 2022.05.31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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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훈 정치외교학과 교수
강명훈 정치외교학과 교수

몇 년 전 내가 터키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의 일이다. 졸업을 앞둔 고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학 교과목의 강의를 담당했다. 막 박사과정을 마친 나는 신흥국 터키의 정치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학생들을 교육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터키에서 뛰어난 학생들만이 입학하는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학생들의 수준은 매우 훌륭하였다. 그런데 강의를 진행할수록 나는 무엇인가 공허한 느낌에 깊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공허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활발히 토론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들 역시 훌륭하였다. 그런데도 내 강의는 학생들의 마음에 울림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냉소만을 자아내는 공허한 메아리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이지?

이런 고민을 하던 중 한 학생이 나에게 유학을 위한 추천서를 부탁했다. 나는 그 학생을 잘 알지 못했기에 왜 유학을 하고 싶은지를 물어보았다. “터키를 떠나고 싶어요”라는 그 학생의 충격적인 대답에서 나를 괴롭혀온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내가 느낀 공허함은 학생들 사이에 넓게 퍼진 체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속 중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폭압적 권위주의 통치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 터키 리라화 가치의 폭락 및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제난과 빈부격차의 심화, 공직사회는 물론 일반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부패와 비리 등의 상황에서 터키 학생들은 희망을 버리고 탈(脫)터키를 통한 각자도생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적인 정치모델을 가르치는 나의 강의는 그들에게 자신들과 상관없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으리라. 터키 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부라스 튀르키예! (여기는 터키야!)”라는 체념적 표현에 답이 있었던 것이다. 강의실에서 배우는 지식은 현실에는 거의 쓸모없지만 그나마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의 탈출에 필요한 학점 따기 목적의 쓸모만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있는 메마른 황무지에서 사는 이들에게 나는 어리석게도 어떻게 하면 잡초를 솎아내고 나무의 잔가지를 정리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셈이었다.

이후 강의실에서 나의 조그만 노력이 시작되었다. 교과서 내용의 기계적 전달보다는 학생들의 메마른 마음에 희망의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러분들이 터키 사회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여러분이며 여러분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곧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맞곤 했다.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기성세대들이다. 그런데 왜 내가 힘들게 비용을 들여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나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이 사회를 떠나는 것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난 아직도 이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알버트 허쉬만(Albert Hirschman)은 그의 역작인 『Exit, Voice, and Loyalty(역제: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에서 공동체에 대한 충성의 정도가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개인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역설하였다. 충성도가 높은 경우 힘들고 비용이 들더라도 목소리를 내는 항의를 통해 공동체에 남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충성도가 낮을 경우는 미련 없이 조용히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이다. 터키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미래의 희망이 충성도 만큼 중요한 요인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터키처럼 젊은 청년들이 조용히 탈출하려는 희망의 황무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징후는 여기저기서 관찰된다. ‘탈조선’, ‘헬조선’이라는 용어의 유행, 계속 신저점을 기록하는 혼인율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청년들의 조용한 탈출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개 선생으로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나 교수로서의 내 사명은 학생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그들이 조용한 탈출보다는 시끄러운 목소리를 내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는 한국이야!’라는 표현이 체념적 표현이 아니라, 청년들의 당당한 목소리가 반영된다는 희망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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